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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Feb 10. 2023

프리지아는 아직이에요

-303

그의 책상에 꽃을 사다 놓기를 시작하면서 은근히 걱정했다. 요즘은 우리나라도 한겨울 아주 추울 때는 영하 20도 가까이 떨어지는 날들도 있는데, 그 타이밍 맞춰서 꽃이 시들거나 하면 그땐 어떡하지 하고. 아닌 게 아니라 올해도 몇 번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의 책상에 시든 꽃을 꽂아놓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잘 비껴서 싱싱한 꽃들로만 그의 책상을 꾸며놓는 것에 그럭저럭 성공했다. 사람이란 다 닥치면 어떻게든 하는 모양이다.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들로.


지난주에 그의 책상을 지킨 꽃을 알스트로에메리아라는,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의 꽃이었다. 어찌나 이름이 낯설고 어려운지 꽃집 사장님도 몇 번이나 발음을 씹으셨다. 크기가 좀 작은 참나리 비슷하게 생긴 꽃이었는데 연한 분홍색과 노란색의 두 종류가 있어서 한 단씩을 사 와 섞어 꽂아 두었다. 그리고 그 꽃 또한 제법 열흘 가까이 그의 책상을 지켰다. 다만 그 꽃을 꽂아두었던 지난주는 내가 마음이 편치 않은 일들이 여럿 터지는 바람에 그 자태를 제대로 잘 봐주지 못한 점은 아쉽다.


이제 슬슬 다음 꽃을 살 타이밍이었다. 때마침 온도도 껑충 올라서 꽃을 사들고 들어올 때 꽃이 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건 좋았다. 사장님은 도매시장에라도 다녀오셨는지 신문지에 둘둘 싼 꽃들을 한가득 널어놓고 정리 중이셨다. 갖가지 색깔과 크기의 장미들이 많았다. 원래 장미를 썩 좋아하진 않았다. 어쩐지 전형적이고 식상하게 느껴져서였다. 그러나 근 1년간 이런저런 꽃들을 사다가 꽃병에 꽂아본 결과, 과연 장미는 꽃의 여왕이라 할 만한 꽃인 것 같다.


온갖 색깔의 장미들 중 연한 크림색이 나는 흰 장미가 눈에 밟혀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던 중에 사장님이 저쪽을 가리키셨다. 장미 좀 질리시면 프리지아 가져가세요. 지금 살짝 제철은 아니라서 가격은 조금 비싼데, 그래도 등급 좋은 걸로 떼와서 싱싱하고 예뻐요. 사장님이 가리킨 쪽에는 꽃망울이 조랑조랑 달린 노란 프리지아가 가득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 울컥해졌다. 급작스레 그를 떠나보내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는 그날 하루가 지난 후, 나는 거의 발작을 하듯 신발을 주워신고 집 근처 마트로 달려가 화훼 코너에서 프리지아 한 줌을 사다가 꽃병에 꽂아 그의 책상에 놓았다. 그와 함께 장을 보러 다니다가 화훼 코너 앞을 지나가면서 간만에 미친 척하고 꽃이나 한 줌 사줘 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게 생각나서. 결국 그게 다 생각으로만 그쳤던 게 생각나서. 그게 시작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이야기를 꽃집 사장님에게 한 적이 없다. 그분에게 나는, 그냥 꽃 사다가 꽃병에 꽂아놓는 취미가 있는 새로 생긴 단골일 뿐이다. 내게 프리지아가 어떤 의미가 있는 꽃인지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프리지아는 다음에요. 그래서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4월달 되면, 그때 사갈게요. 4월달 되면. 사장님은 왜 하필이면 꼭 집어 4월이냐고는 물어보지 않으셨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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