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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Feb 12. 2023

그 아까운 한우등심을

-305

모든 일에는 핑계가 필요하다. 적어도 나는 좀 그런 타입의 인간이다. 다른 핑곗거리가 없이, 그냥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그랬다는 식으로는 나는 잘 움직이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를 그 방향으로 떠밀어줄 아주 조그만 힘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게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힘으로 톡 건드리는 정도에 불과할지라도.


그런 의미에서 어제 아침 온 마트의 세일 문자는 좀 나갔다 올 핑계로는 아주 충분했다.


사실 마트의 할인행사 문자만큼 속 빈 강정도 드물다. 그 숱한 할인 품목은 마치 우리 집 사정을 다 알고 기가 막히게 피해 간 것처럼 지금 나한테 필요한 것들은 요리조리 피해서 짜놓은 듯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대충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냥 이참에 바깥바람도 쐬고, 마트 구경도 하고, 그러고 오자는 것이 목표였던 셈이다. 그러니까 핑계라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간 마트에서, 나는 만 원이 조금 넘는 가격에 1++ 등급 한우 등심 200그램짜리 한 덩어리를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잠깐 눈이 뒤집혀서 집어 들긴 했는데, 이걸로 도대체 뭘 하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그가 들었으면 실로 천지가 개벽할 짓을 해버리기로 했다. 텔레비전에서 어느 탤런트가 하던 방식대로 버터를 잔뜩 녹여서 구운 후에 파채와 상추를 뜯어 넣은 비빔면이랑 같이 먹기로 한 것이다. 그가 이 천인공로할 계획을 들었으면 그게 무슨 짓이냐고 펄펄 뛰었을 것이다. 자고로 한우는 각을 잡고 구워서 스테이크든 구이든 해 먹는 거라고, 그렇게 막 구워서 비빔면이랑 같이 먹는 건 삼겹살이나 그러는 거라고. 그러나 나는 어쨌든 이 등심 한 덩이로 점심 한 끼를 해결해야 했고 이걸 맹탕 구워서 밥 한 그릇과 같이 먹어서 될 일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저질러버리기로 했다.


아무리 한우 등심이라지만 그것만 굽는 건 아무래도 심심해서 양파 한 개와 표고버섯 두 개를 채 썰어서 같이 구웠다. 자고로 버터엔 마늘이다 싶은 생각에 중간에 한 숟갈 듬뿍 넣은 간 마늘 때문에 고기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타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라진 고기 단면이 아직도 벌겋게 덜 익어 있어서 나는 연신 어떡해 어떡해를 부르짖으며 악전고투 끝에 그 한우등심 한 덩이를 어찌어찌 굽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들고 앉은 내 점심 한 끼는, 뭐 이만하면 기생충에 나오는 연교의 '채끝 짜파구리'까진 아니더라도 이만하면 꽤 사치스럽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잠시 웃었다. 그렇게 구운 한우 등심은, 엉망진창인 내 고기 굽는 솜씨를 원판의 힘으로 전부 커버칠만큼 맛있었다. 밥 한 술 넘길 엄두가 나지 않아 프로틴 음료 서너 병으로 하루를 살던 지난 4월의 내가 본다면 기겁을 할 일이다.


당신은 가고 없는데 나는 살겠다고 세일하는 한우 등심씩이나 사다가 구워 처먹으면서 그렇게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일찍 도망가랬냐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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