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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Feb 16. 2023

약 좀 사다 줘

-309

그는 위가 약했다. 집안 내력이라는 것 같았다. 조금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바로 위장부터 반응이 왔다. 가끔 저녁을 좀 과식한 날은 그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속이 더부룩해 어쩔 줄을 모르곤 했다. 반면에 나는 위가 꽤 좋은 편이었다. 뭘 어떻게 먹어도 웬만해서는 탈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전 이런저런 복잡한 일신의 일을 겪으면서 나는 속쓰림이라는 게 뭔지 알게 되었고 가끔은 잘 자다가 코까지 솟구치는 위액에 놀라 벌떡 일어나 앉게 되었다.


그가 떠나고 난 후 크게 아픈 적은 없었다. 아마도 몸이 알아서 몸을 사리는 중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예의 '속이 아픈' 증세도 포함되어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인데 내 위장은 신통하게도 그날 이후 한 번도 이렇다 할 말썽을 부린 적이 없다. 물론 여기에는 그와 함께 밤늦도록 집어먹곤 하던 간식을 끊은 탓도 상당 부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는 중이긴 하다.


그리고 그렇게 멀쩡하던 위장이 어제 점심을 먹기 전쯤 소소한 파업을 일으켰다.


처음엔 그냥 살살 위가 쓰리고 신트림이 좀 올라오는 정도였다. 밥 먹으면 낫겠지. 처음엔 뭐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한 30분 있으면 밥 먹을 거니까 그러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러나 그로부터 한 10분 사이에 위장의 통증은 시시각각 심해졌다. 나중에는 누군가가 배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고 위를 쥐어짜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눈앞에 별이 보인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그런 식의 통증은 또 살던 중 처음이라 아픈 중에 당황하기까지 한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약이 있을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을 모아놓은 서랍을 열고 아무렇게나 뒤졌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은 죄다 감기약, 진통제 같은 것들 뿐이었다. 지금 이 증상에 먹을 만한 약은 없었다.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에 웅크린 채 통증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그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5분쯤이 지나자 조금 통증이 나아져서 간신히 허리를 펴고 앉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통증의 피크가 지나갔을 뿐 뭔가가 위장을 휘휘 저어대는 것 같은 통증은 그대로였다. 어떡하지. 나가서 약을 사 와야 하나. 거기까지만 생각했는데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얼마 전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던 약국이 폐업을 해버려 가장 가까운 약국은 집에서 10분쯤을 걸어가야 하는 곳에 있다. 이러고 거기까지 가란 말이지. 순간 딱 죽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의 책상을 정리하다가 구석에서 제산제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은.


나는 벌떡 일어나 그의 책상을 뒤졌다. 아닌 게 아니라 책상 가장 가쪽 구석에 제산제 한 통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나는 손까지 덜덜 떨며 그 제산제 한 팩을 그 자리에서 짜서 마셨다. 정말로 그 제산제가 잘 들은 건지 아니면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였는지, 그 발작에 가까운 통증은 그렇게 수그러들더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혼자 산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통증이 가라앉은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뭘 어떡해야 할까. 세상의 모든 약을 다 집에 상비해 놓고 살 수도 없을 텐데. 약 좀 사다 달라는 응석을 부릴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어느 오후에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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