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도 않으면서 그냥 갖고 있는 게 좋아서 사는 물건이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게는 만년필이 그랬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하면 거의 대부분이 네가 만년필을?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데, 단순히 만년필이라는 물건이 보통의 볼펜에 비해 관리와 보관이 까다로운 물건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굉장한 악필이기 때문이다.
악필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야말로 '괴발개발'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타입의 악필이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에는 교무실에서 '몇 반의 그 노트 필기 엉망으로 하는 애'로 유명했다. 플러스펜 같은 수성펜 종류를 쓰면 조금 나은데 일반적인 유성볼펜을 쓰면 너무나 조잡해 읽을 수 없는 글씨인 것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다. 열아홉 살 무렵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나에게 준 강렬한 첫인상 중 하나는 그 건장한 사람의 글씨체가 너무나 깔끔하고 오밀조밀하다는 것이었다.
요즘은 필체가 지저분하다고 해서 딱히 불편함을 느끼는 시대는 아니다. 어지간한 건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나 태블릿 pc, 핸드폰으로 해결할 수 있다. 요즘은 가게에서도 종이전표에 서명을 받지 않는다. 손글씨가 필요한 순간은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몇 가지 서류를 쓸 때뿐이다. 그 순간의 민망함만 참고 견디면 얼마든지 내 악필 따위 모른 체하며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10년 이상을 그렇게 살았다.
그를 떠나보낸 후 멀쩡하게 잘 있다가도 울컥 뭔가가 치밀어 혼자 어쩔 줄을 모르는 증세가 생겼다. 그것은 순전한 슬픔이 아니라서 울어도 풀리지 않고 순전한 절망이나 두려움도 아니라서 딱히 해결할 방법도 없다. 그냥 그의 부재 앞에 내가 느끼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조금씩 뭉쳐지다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커진 순간 목구멍을 뚫고 위로 올라오려는, 일종의 감정적인 구토에 가깝다.
며칠 전부터 나는 이런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펜글씨를 쓰고 있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커다란 방안지 서식에 좋은 노래 가사나 시구 같은 것을 보기 좋은 폰트를 골라 타이핑한 후에 연한 회색으로 색깔을 바꾸어 출력한다. 그러면 훌륭한 펜글씨 교본이 된다. 그 위를, 따라 그리듯이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것이다. 사놓고 겉멋이 들어 가지고만 다니다가 얼마 전부터는 그나마도 그냥 아무 데나 처박아 두었던 파카 만년필은 그 덕분에 제 할 일이 생겼다. 몇 년을 쓰지 않은 만년필은 잉크가 다 굳어버려 컨버터를 씻고 닙에 말라붙은 잉크를 빼는 데만 꼬박 만 하루가 걸렸다. 만년필을 사면서 같이 샀던, 한 만년필 브랜드에서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내놓은 잉크(흔히 블루블랙이라고 하는 짙은 남청색이다)를 채워서 쓰고 있다. 나는 손글씨에 익숙하지 않고, 몇 년 사이에 더 그렇게 되었고, 그래서 겨우 아주 커다란 글씨로 A4 용지 다섯 장쯤을 쓰는 데 30분 이상이 걸린다. 그렇게 뭔가를 꾸역꾸역 쓰고 나면 제일 먼저 느끼는 건 지나치게 힘을 줘 펜을 꽉 쥔 손가락이 아프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늘도 밀리지 않고 뭔가를 해냈다는 작은 뿌듯함이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도 모를 그 정체 모를 감정의 덩어리는 어느샌가 가라앉고 작은 평온이 찾아온다. 서예가 왜 마음을 닦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언젠가 지금 연습하는 필체가 손에 조금 익을 때쯤이면 예쁘게 쓴 손편지를 가지고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그리고 지금 봉안당에 넣어놓은 편지 대신 새 편지를 넣어두어야지, 그런 생각을 한다. 한참 열렬하던 시절 그에게 쏟아붓듯 보낸 수백 통의 편지에 적힌 내 글씨는 그렇게나 엉망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일찍 글씨교정을 해서 예쁘게 쓴 편지를 보낼 걸 그랬다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