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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가 바뀌고 이제 5월이라는 사실을 별로 체감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며칠 전 기계적으로 달력을 넘겼지만 실감은 나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나의 시간은 2022년 4월 초 그 어느 날에 멈추어선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거기엔 아마도 내가 요즘 텔레비전의 실시간 방송을 전혀 보지 않고 있다는 이유가 클 것이다. 하루에 한 번은 보던 뉴스도, 즐겨보던 예능 프로그램들도 한 달째 안 보고 있다. 그와의 마지막 밤에 같이 보고 잠들었던 프로그램 하나는 앞으로도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같이 보던 드라마들은 어떻게 끝났는지 알지 못하고 새로 시작한 드라마들은 뭐가 있는지, 어떤 드라마들인지도 알지 못한다. 유독 이렇게 방송에 민감하게 구는 것은 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좀 의아한 데가 있는데, 내가 vod를 끄고 밖으로 나가는 데는 아마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얼마 전에 백상 예술 대상 시상식이 있었다는 모양이다. 당연히 보지 않았다. 대통령이 바뀐다는 것조차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마당에 딱히 응원하는 배우나 작품도 없는 시상식까지 챙겨볼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그러던 중에 한 친구가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너 그 시상식도 안 봤을 거고 별로 볼 마음도 없는 것은 알겠는데 거기 상 받은 배우 하나의 수상 소감이 진짜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니 유튜브 클립으로라도 한 번 찾아보라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했기에 저러는가 싶었다. 수상소감? 몇 년 전 한 배우의 소위 '차려진 밥상' 수상 소감이 한동안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었는데 뭐 그런 건가 정도의 느낌밖에는 없었다.
나도 아는 배우였다. 그와 함께 즐겁게 봤던, 어느 탈영병 체포조의 이야기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했던 배우. 알고 보니 어느 유명 래퍼의 동생이라던지 해서 형이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하고 놀랐던 그 배우였다. 아, 저 사람 상 받았구나. 하긴 거기서 연기 잘했지. 뭐 그 정도의 생각을 했다. 그 배우의 아버지는 투병 끝에 임종을 앞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 자리를 빌어 아버지에게 용기를 드리는 말을 좀 하고 싶다고 운을 떼더니 불쑥 그런 말을 했다.
아빠가 눈을 조금만 돌리면 마당 창 밖으로 빨간 꽃이 보이잖아. 그거 할머니야. 할머니가 거기 있으니까 아빠가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죽는다는 건, 그냥 존재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인 것 같다고. 세월호에 관한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자신은 그때 떠나간 아이들이 분명히 아직도 여기 있다는 걸 느꼈다고. 나는 우는 줄도 모르게 울었다. 그 말은 지난 한 달 내내 내가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말이었다. 누구에게서든, 어떤 식으로든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 사실을, 그 배우의 말을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내게 한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그에게 한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건 결국 그 지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와의 이별이 너무나 갑작스러웠다는 것. 왜 그런 식이어야만 했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갑작스러운 그의 부재와 그에 따른 상실감은 순간순간 지뢰처럼 튀어나와 내 마음을 할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찾을 수 없는 답은 내가 지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런 거라는, 어느 책에선가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아마도 꽤나 오랫동안 그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고 그로 인해 괴로워할 것이다. 그가 내 곁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방식이 조금 바뀐 것일 뿐이라는 그 배우의 말을, 나는 언제쯤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가 떠나간 이후 부쩍 떠나간 사람들이 눈에 밟힌다. 강수연 배우, 이외수 작가, 김지하 시인 같은 분들. 그가 떠나기 전에도 수많은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그때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겠지만.
봄에 떠나간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빈다. 그들은 분명, 여기보다 더 좋은 곳에 계실 것이라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