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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Feb 18. 2023

무사시보 벤케이의 튤립 2

-311

그의 책상에 꽃을 갖다 놓는 것은 처음에는 분명 애도의 의미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그렇듯 하나의 일이 오랜 시간을 머금으면 조금씩 다른 이유가 덧붙여지기 시작한다. 10개월 여가 지난 지금 꽃을 사러 꽃집에 가는 것은 은근히 기다려지는 나의 일상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역시 예쁜 것에는 죄가 없는 모양이다.


꼭 한 번 사다가 꽂아놓고 싶은 꽃들이 몇 종류 있었다. 칼라라든가 백합이라든가 튤립이라든가. 그러나 이 꽃들은 죄다 타이밍이 맞지 않거나 너무 비싸거나 혹은 저걸 사다 놓으면 도대체 며칠이나 갈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동안 제대로 사오지를 못했었다. 유독 튤립만 한 번 다른 꽃들과 섞어 딱 한 송이를 사 와 본 적이 있다.


앞전에 사다 놓은 흰 장미가 아주 활짝 피다 못해서 한 송이씩 바깥 꽃잎부터 떨구기 시작하기에 이제 슬슬 새 꽃을 사 올 때가 됐구나 싶어 꽃집에 갔다. 꽃값이 너무 비싸서 죽겠다고 사장님은 죽는소리를 하셨다. 저번 주에 제가 사 갈 때는 한송이 4천 원이었는데, 그것보다 더 올랐나요? 요즘은 한 송이에 6천 원씩 해요. 그래서 얼마 사오지도 못했어요. 이맘 때는 졸업 입학 시즌이라 그래요. 뭐 그런 대화들이 한참을 오갔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꽃을 사갈까 하고 쇼케이스 안을 둘러보던 내 눈에 소담하게 피어 있는 분홍색 튤립이 꽂혔다. 한 10개월 간 꽃을 사 본 결과 꽃은 오래 골라봐야 답이 없고 그냥 첫눈에 꽂히는 걸 사야 한다. 그러나 튤립은 어쩐지 좀 망설여졌다. 지난번 사 왔던 튤립이 시드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선 채로 한순간에 꽃잎을 떨구고 옥쇄(정말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된다)하는 순간을 봐 버린 것이 내게는 적이 충격으로 남아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사장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글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튤립은 따뜻하면 피고 추우면 오므라드는데 그렇게 한순간에 져버린다는 이야기는 저도 처음 듣네요, 라고. 근데 꽃이라는 건 워낙에 변수도 많고 어느 화원에서 떼오느냐에 따라서 꽃의 컨디션 자체가 다르기도 하니까요. 손님이 뭘 잘못하셔서 그런 거 아닐 수도 있어요. 관리 열심히 하시는 것 같으신데.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나는 튤립에 재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어제 사온 튤립들은 죄다 허리가 굽어 있었다. 이왕이면 좀 꼿꼿하게 산 걸로 가져가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사장님은 튤립은 빛에 민감해서 빛을 따라가느라 이런 거고, 집에서 햇빛 잘 보게 해 주시면 허리 꼿꼿하게 펼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정말일까. 화분에 심은 산 꽃도 아니고 꽃병에 꽂은 꽃이 그렇게 변한다는 게 내심 믿기지 않았지만 다른 걸로 달라고 떼를 쓸 엄두도 나지 않아 나는 그냥 사장님이 포장해 주신 튤립을 들고 집에 돌아와 손질을 해서 그의 책상에 꽂았다. 그리고 어젯밤 자리에 누우려다가, 나는 그 튤립들이 죄다 주군 곁에 정좌한 무사처럼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 있는 걸 발견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이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굉장히 줏대 있는 꽃이구나, 하고.


여리여리해 보이지만 실은 이렇게 씩씩한 튤립을, 그가 내 곁에 있을 때 좀 보여줬더라면 좋았을 걸.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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