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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을 요즘 여러 가지 방향에서 절감 중이다. 우리 집은 그다지 넓고 크지 않고, 그래서인지 그가 떠나버린 빈 집은 유독 휑하게 느껴진다. 그와 공유하던 공간들은 이젠 오롯이 나 혼자 쓰는 공간이 되었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집을, 나는 마치 오기라도 부리듯 매일매일 쓸고 닦고 청소하며 더 이상 남루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루틴이 생겼다. 하루에 한 가지씩, 쓸모없는 것을 버리는 일이다.
일의 발단은 냉장고 속에 든 것을 웬만하면 썩혀서 버리지 않고 먹어서 없애겠다는 결심을 하고부터였다. 그 과업은 100 퍼센트 성공적으로 수행 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당근과 호박, 남아있던 계란들, 음료수 같은 것들을 꾸역꾸역 먹어냈다. 나는 그에 비해 먹을 것을 장만하는 것에 진심이지 않았고 그럴 의욕도 없었다. 그의 계획에 따라 3주에 한 번 정도 마트에 주문한 물건들이 오는 날이면 냉장고가 너무 꽉 차서 문을 열어도 불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그렇게 살 수는 없을 터였다. 최소 주문 금액 정도나 겨우 맞춰서, 내가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만을 조금씩 주문해서 사다 놓고 먹게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집안 곳곳에 널려 있는, 쓰지도 않으면서 재 놓고 있는 물건들이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본격적으로 다 치우고 정리하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래서 좀 더 편리하고 안일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냥 하루에 뭐가 되든 한 가지씩만 버리는 것이다. 내용물을 다 먹고도 혹시나 어딘가에 쓰려나 싶어 모아놓은 병들이든, 이미 기재된 정보들이 죄다 바뀌어버려 아무에게도 줄 수 없게 된 옛날 명함이든, 사용기한이 지나버린 신용카드들이든. 정 안되면 이젠 활동하지 않는 웹사이트에서 내 흔적을 모두 지우고 탈퇴하는 것이라도.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꽤 구구절절한 후폭풍을 동반한다. 물건을 버린다는 건 그 물건에 얽혀있는 내 기억의 일부를 버린다는 의미이며 슈뢰딩거의 고양이마냥 불투명한 채로 남겨져 있는 언젠가 그 물건을 사용할지도 모르는 순간들 모두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건을 버린다는 데는 꽤 담대한 결단과 심오한 사려를 요구한다. 사실 내가 그동안 쓸모없는 물건들을 제때 버리지 못하고 재어 놓은 것은 저런 과정의 번잡함을 회피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나는 기꺼이 하루에 한 번씩 저런 순간을 대면하고 지금까지도 안 썼으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말을 되뇌며 그 물건들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처박는 일을 감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도 결국 예외는 있다. 그의 물건들이다. 49제가 다가오고 있지만 나는 아직 그의 옷도, 물건들도 하나도 정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49제가 지나서까지 떠난 사람의 옷가지 같은 걸 가지고 있으면 좋지 않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듣고 있지만, 그래서 몇 번이고 정리하려고 마음을 먹어 보았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요즘 내가 나에게 속한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결국 그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조금만 더 가지고 있고 싶다. 그 사람이 내 곁에 살았었다는 흔적들을. 어차피 내가 가진 것들을 정리하는 데만도 시간은 충분히 걸릴 테니까 그의 물건들은 그 후에 조금씩 정리해도 늦지 않겠지. 결국 나는 이런 식으로 나를 합리화한다.
내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