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사리면은 사리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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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우리 집에는 남아도는 라면 스프가 많다. 그가 있을 때의 유산 아닌 유산인 셈이다. 그는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일정 금액 이상을 구매하면 사은품으로 주는 라면이 있거나 이거 왜 이렇게 싸게 팔지 싶은 라면이 있으면 한 팩씩 사놓았다가 면은 사리가 필요할 때 쓰고 스프나 프레이크는 국물을 낼 때 간이 좀 심심하다 싶으면 썼다. 그러나 그는 '마법가루'의 도움이 없이도 국물을 잘 내는 편이었고 그래서 그런 식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남은 라면 스프가 종류별로 몇 가지씩 있다. 그거 그렇게 놔뒀다가 뭐하려고 그러냐고 내가 물으면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제 스프가 있으니까 라면 없을 때는 2천 원도 안 하는 사리면이나 한팩 사다가 이거 넣고 끓여 먹으면 온갖 라면이 다 되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가끔 출출한 오후 시간에 다른 간식은 아예 먹지 않을 각오를 하고 라면 하나를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여서 먹을 때가 있다. 이렇게 '간식'으로 먹을 라면에 온돈을 들이는 것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번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사리면 한 팩을 샀다. 그리고 며칠 전에 첫 개시로 국민라면 소리를 듣는 라면의 스프와 프레이크를 꺼내서 사리면이랑 같이 끓여봤다. '별로'였다. 라면이 다 라면이라고 생각했더니 그게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라면마다 다 면의 굵기와 두께, 모양, 튀긴 정도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게 맛의 디테일에 이렇게까지 큰 영향을 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제는 급작스레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해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예의 빨리 먹어 없애야 하는 올리브유에 마늘 볶고 양파 볶고 햄과 표고까지 잘 볶아 놓은 후에 알량한 파스타면 한 줌 아끼겠다고 사리면 하나를 끓여서 넣는 짓을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면이 다른 걸 다 버려놓은 맛이었다. 굳이 라면으로 된 스파게티를 먹으려면 시판용으로 다 세팅돼서 나온 걸 사 먹을 일이지, 나 같은 요리 초보가 라면 사리를 가지고 뭔가 '요리'를 하겠다는 건 아직은 대단히 주제넘은 일인 것 같다는 게 어제의 결론이었다. 아직도 사리면이 한 두어 개 남았는데 저건 정말 라볶이나 해먹을 일이지 저걸로 다른 뭔가를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 봉지에 천 원 남짓하는 하찮은 라면 하나조차도 이 면발에는 이 스프가, 이 스프에는 이 면발이 최적의 맛을 낸다는 나름의 조합이 다 있는 모양이다. 그깟 라면 하나도 그런데, 20년이 넘도록 그 사람 옆에서 살도록 튜닝돼 버린 나야 뭐 말할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렇게 허우적거리면서 살고 있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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