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오늘은 늦잠을 자지 않았다

-360

by 문득

일 년 전 오늘, 나는 아홉 시쯤에야 겨우 일어났던 것 같다. 전날 두 시쯤 잠들었으니까. 어딘가에 보낼 서류가 하나 있어서 출력을 하고, 그 서류를 넣을 서류봉투를 사러 문방구에 다녀왔다. 문방구에 다녀오는 길에 싱크대 수전이 고장 난 문제로 관리실에 전화를 해서 싱크대 타공이 몇 밀리로 되어 있는지, 그런 걸 물어봤다. 집에 와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일어나지 않는 그를 흘끔흘끔 바라보며 오늘 너무 늦게까지 자네, 하는 류의 말들을 몇 번 중얼거렸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일곱 시 반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하던 대로 꽃병에 물을 갈고, 봄을 맞아 무섭게 자라고 있는 무화과와 한 포기가 자꾸 드러누워서 걱정인 다육이를 창가에 내놨다. 침대를 정리하고 얼마 전 새로 산 섬유향수를 뿌렸다. 오늘이 첫 사용하는 날이었는데 스프레이가 막혔는지 잘 나오지 않아 한참이나 씨름해야 했다. 그래놓고 늘 하던 홈트까지 마치고 샤워까지 한 후에 자리에 앉았다. 그 많은 일을 해치우고도 여덟 시 반밖에 안 돼서, 일 년 전의 내가 얼마나 게을렀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제는 잠이 쉽게, 잘 들진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잠이 오긴 했다. 그 점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어쩔 수 없는 배신감을 느낀다.


이 글을 쓰고 나면 봉안당에 간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고 비명을 지르며 119에 전화를 하던 그 시간쯤에는 아마 봉안당 그의 앞에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잠깐 헤어진 지 1년이 되는 날인데 거기선 어떻게 지내냐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아픈 일도 슬픈 일도 없이 잘 있냐고. 그런 말들을 물어보려고 한다. 그날도 날이 화창했다.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고 돌아오다가 길거리 가득 핀 봄꽃들을 보고 왈칵 눈물이 터져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고 오늘도 날씨는 좋을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는 꽃집에 들러 프리지아를 사기로 했다. 1년 전 내일, 그를 생각하며 처음 사다 놓았던 꽃이다. 벌써 한참이나 전부터 샛노란 꽃망울이 올망졸망 맺힌 프리지아가 나 좀 데려가라는 듯 꽃집에 갈 때마다 손을 내밀었지만 그때마다 넌 아직 차례가 안 됐다며 억지로 다른 꽃들을 사 왔었다. 1년 전 그때도 그 수수한 노란 꽃들이 갈팡질팡하던 내 마음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던지. 이번에도 그러길 바라 본다.


카톨릭이나 기독교 계통의 결혼식에서 성혼선언을 할 때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겠느냐고 신랑신부에게 묻는다. 그리고 나는 내게 그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 상황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실감하기 시작하는 중이다. 그래도 뭐,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 생각이나 해볼 참이다. 화분에서 시들어버린 화초라도 뽑아내듯 지나간 내 20년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나는 어쨌든 그 시간들을, 그 기억들을 계속 지닌 채 살아가야만 하니까.


오늘은 그 말을 해주고 와야겠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지내라고. 뭐 그리 긴 시간이야 걸리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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