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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자들이 그러하듯 아주 오랫동안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는 내 로망이자 이상향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40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머리를 해 보지 못했다. 뭐든 다 그렇지만 돈과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일이란 이 세상엔 없는 법이고 심지어는 물을 안 줘도 알아서 자라는 머리를 기르는 일조차도 그러했다. 나의 인내심은 언제나 어깨를 조금 덮는 정도에서 바닥났고 끝이 갈라진다는 둥 엉킨다는 둥 하는 핑계를 대고 잘라버리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렇게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나는 그 '긴 생머리'에 대한 로망을 자의 반 타의 반 포기했다.
그가 떠나고 난 후 나는 본의 아니게 다시 이 머리 기르는 일에 재도전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나 자신에게 돈을 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고 나중에는 괜히 혼자 미용실에 갔다가 나를 알아보는 미용사에게서 신랑은 왜 같이 안 왔느냐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참에 머리 한 번 길러 보지 뭐 하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1년 이상을 기른 내 머리는 어영부영 등의 중간 정도까지 내려왔다. 아마 내 평생 가장 길게 길러 본 기록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렇게 '기르기만 한' 머리는 여러 모로 사람을 애먹였다. 수시로 엉키고, 갈라지고,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로 축축 늘어졌다. 정말 이 머리 이대로 길러야 하는지, 그래도 될 건지 하는 생각을 며칠 하다가, 나는 어제 결국 머리를 자르기로 결심했다. 인근의 미용실은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지 않아 집에서 한참 떨어진 낯선 미용실을 골랐다. 자리에 앉아서, 늘 하던 대로 숱 좀 치고 기장 좀 다듬으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머리 관리를 하나도 안 하셨네. 이런 머리는 숱치면 더 부스스해져요. 끝도 지금 엄청 많이 상했어요. 한 뼘 정도는 잘라야 될 것 같은데요.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럼 그렇게 잘라 주시라는 말을 했다. 그렇게 가위질 몇 번에, 내 머리는 어깨를 조금 덮는 정도의 중단발로 짧아졌다. 어쩐지 조금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그랬거나 말았거나 머리를 감을 때 한 반 정도만 감는 기분이 들고, 금방 마르기도 하고, 뭣보다도 묶어서 대충 틀어 올린 머리가 제풀에 줄줄 흘러내리지 않는 점 하나만은 편하긴 하다. 길이가 짧아져서 그런지 지들끼리 엉키는 것도 훨씬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고.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1년 동안 미용실을 한 번도 안 가는 건 너무했지. 제 풀에 발이 저려서 그의 사진 액자에다 대고 그런 말을 했다. 미용사가 그러더라. 머리는 뭐 아무나 기르는 건 줄 아냐고. 매직도 하고, 영양도 주고, 그렇게 관리하면서 길러야 되는 거래. 그냥 안 자르고 냅둔다고 머리 기는 거 아니래. 그런 거면 나는 텄지 뭐. 하기야 내 주제에 무슨 놈의 생머리야 생머리가. 그래도 죽기 전에 한 번은 길고 찰랑찰랑한 머리 해보고 싶었는데.
말하던 끝에, 그냥 좀 허탈해졌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