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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pr 18. 2023

작약 지는 거 보셨어요?

-370

사와서 꽃병에 꽂아놓자마자 그날 오후에 바로 만개해버려서 사람을 당황시킨 작약 이야기를 며칠 전에 쓴 적이 있다. 내심 생각했다. 아 하루이틀 사이에 지겠구나. 나름 1년 남짓, 총 47종류의 이런저런 꽃들을 사다가 꽃병에 꽂아본 결과 꽃은 만개해 버리면 그 순간부터는 죽어간다. 활짝 핀 자태가 워낙 화려하고 예뻐서 마음이 안 좋았지만 어쩔 수 없지 생각하기로 했다. 사온지 딱 3일만에 시들어버린 수국 생각도 났고.


그런데 웬걸, 작약은 그 상태로 생각보다 오래 갔다. 꽃잎이 있는대로 다 펼쳐져 180도도 아닌 한 200도까지 벌어져서 속에 든 꽃술이 죄다 밖으로 드러날 정도로 활짝 피었는데도, 이 녀석은 시들지도 않고 꽃잎도 떨어뜨리지 않은 채 제법 쨍쨍하게 며칠을 더 버텼다. 그래서 아침마다 꽃병에 물을 갈아주고 꽃대를 잘라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 너 진짜 대단하다고. 이러고 어떻게 버티냐고. 그렇게 고작 네 송이밖에 안 되는 작약은 무슨 장판파 다리 위를 점거하고 선 장비마냥, 한단을 사다 꽂은 안개꽃보다도 더 풍성한 자태로 며칠이나 그의 책상 앞을 지켰다.


그런데 작약이 시드는 장후는 꽃잎이 벌어지는 정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색깔로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그저께 저녁쯤부터 나는 좀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 색깔이 저렇게 희끗하지 않았었는데. 좀 더 선명한 분홍색이었던 것 같은데.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확연해졌다. 작약의 색깔이 빠지고 있었다. 마치 삽투압 같은 걸로 인해 어딘가로 빠져나가듯이. 그리고 그 색이 뻐져나간 자리에는 시든 티가 역력한 희끗희끗한 꽃잎이 남았다. 아. 너 이제 수명이 다했구나. 그런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까진 멀쩡했던 꽃잎들이 실로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하룻밤만에 머리가 다 쇠어 백발로 변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 생각이 났다. 역시, 작약은 철없는 공주님이랄까 좀 그런 캐릭터인 모양이다. 구름같이 피어 있던 작약을 치워버리고 난 그의 책상은 너무 허전해서 내가 다 몸둘바를 모르겠다. 이따 열 시가 조금 지나 꽃집이 문을 열 시간이 되면 불문곡직 나가서 뭐라도 사와서 꽂아 놓아야지.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도 떠나기 전에 좀 옆에서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1년 전 그날, 제대로 된 인사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를 그렇게 떠나보내지 않았을 텐데. 작약이 져 버린 아침에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럴 수 없다는 걸 모르지도 않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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