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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pr 23. 2023

벚꽃은 엔딩이어도

-375

지난 5월쯤 시작한 펜글씨는 아직도 하고 있다. 브런치에 매일 글을 남기는 것과 더불어, 뭐든 싫증 잘 내고 꾸준하게 못하는 내가 제일 길게 하고 있는 자발적 프로젝트가 아닌가도 싶다.


펜글씨를 쓸 때는 만년필 세 자루를 놓고 돌아가며 쓰고 있다, 이 세 자루에는 각기 다른 색깔의 잉크가 들어있다. 가장 필기감이 무난한 1번 만년필에서는 한 만년필 브랜드에서 한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이름을 붙여 만든 블루블랙 색깔의 시그니쳐 잉크가 들어있다. 내 만년필 중 가장 오래됐고 닙이 굵어서 글씨가 굵게 써지지만 제일 필기감은 부드러운 2번 만년필에는 와인색 잉크가 들어있다. 셋 중 제일 막내라 살짝 길이 덜 듯한 3번 만년필에는 올리브색 잉크가 들어있다. 펜글씨를 쓸 때는 주로 가사가 좋은 노래의 일부분을 쓰게 되는데, 그 가사의 내용과 잉크 색깔이 어울리면 그날은 펜글씨를 쓰는 30분 내내 기분이 좋다.


어제 쓴 노래는 타이밍이 살짝 지나가긴 했지만, 이맘때에 안 듣고 지나가면 섭섭한 노래인 '벚꽃 엔딩'이었다. '봄의 캐롤'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노래는, 그러나 의외로 원곡자가 봄이 되자 쌍쌍이 붙어 다니는 커플들이 눈꼴시어서 만든 노래라든가 하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데(그래서 제목 또한 '벚꽃이 날리는 엔딩'이라는 뜻이 아니라 벚꽃 좀 그만 날리라는 뜻의 '벚꽃, ending'에 가깝다던가) 그런 의도로 만든 노래 치고는 노래가 이 짧고 덧없는 계절에 너무 잘 어울리는 서정적인 곡이어서 좀 안타깝기도 하다. 그 노래를 쓸 타이밍에 걸려든 만년필이 마침 와인색 잉크가 든 2번 만년필이어서, 벚꽃의 색깔 치고는 조금 진한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같은 계통 색깔인 건 사실 아니냐고 우기며 즐겁게 펜글씨를 썼다.


근 1년간이나 하루에 30분씩을 투자해 펜글씨를 쓰고 있는데도 내 글씨는 아주 조금 나아진 정도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이 차분하고 천천히 또박또박 글씨를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는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정리된 글씨가 나오지만 마음이 급하거나 뭔가 평정이 깨진 상태에 오면 여지없이 옛날의 그 지렁이 기어가는 듯한 글씨체가 나 어디 안 갔다는 듯 귀신같이 튀어나온다. 그런 걸 보고 있자면 글씨에도 소위 원판 불변의 법칙 비슷한 게 있어서 열심히 분칠해서 원래의 못난 글씨를 가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인가 하는 서글픈 생각도 가끔 든다. 그러나 어쨌든, 계속 시도는 해 볼 참이다. 하루에 30분 정도 짬을 내서 맨얼굴의 내 필체와 마주치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이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뿐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자전거의 페달을 밟듯이. 그래아만 쓰러지지 않을 수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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