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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03. 2023

도대체 뭘 믿고

-385

어제는 그의 생일이어서 미역국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없는 솜씨에 미역국을 끓이기도 그렇고 본래도 미역국을 썩 좋아하지 않는 터라, 봉안당에 다녀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요즘 잘 나오는 미역국 한 팩 사다가 끓여서 먹으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가만히 보면 일상의 모든 위기는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는 순간에서 온다.


막상 마트에 들어가니 늘 그래왔듯 이것도 사야 했고 저것도 사야 했다. 어제의 스페셜메뉴는 두유였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 대신 한 팩씩 먹곤 하는 두유가 다 떨어졌는데, 24팩이 든 이 무거운 걸 들고 집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에라 이것도 사야 되고 저것도 사야 되는 김에 그냥 5만 원 맞춰서 배달시키자. 그렇게 마음먹은 것까지도 좋았다. 5만 원을 맞추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늘 하는 말로 돈이 없는 게 문제일 뿐 살 게 없어서 문제인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눈짐작으로 한 계산으로 5만 원 정도를 맞췄는데 정확히 5만 1500원이 나와서, 거기까지도 나름 뿌듯했다. 이제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 것들(요거트 같은)만 챙겨서 가볍게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무거운 것들은 배달이 오면 착착 챙겨 넣으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 그의 사진 액자에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고, 밥솥에 설어두었던 예약취사가 무사히 되어 있는 걸 확인하고, 아 이제 밥 먹자 하고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기껏 산 미역국을 배달요청 박스에 그대로 넣어놓고 온 걸 깨닫고 한참을 웃었다.


미역국 사러 마트에 갔던 주제에. 돈을 추가로 몇 만 원이나 쓴 주제에. 정작 미역국은 들고 오지도 않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와. 큰일 났다. 나 벌써 치매 오나 봐. 무슨 인간이 미역국 사러 가서 미역국을 안 들고 오지. 차라리 다른 걸 사느라 정신이 팔려서 미역국을 사지 않았다면 그만큼 허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건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탓을 해야 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럴 거면 아침에 그 정신없는 와중에 예약 취사는 왜 걸어놓고 나간 거냐고.


그래서 나는 어제 오후 네 시 반도 넘어서야 겨우 배달온 미역국을 끓여서 밥 한 술을 뜰 수 있었다.


나 정말 큰일이다. 이렇게 멍청해서 이 풍진 세상 어떻게 살지. 밥을 먹는 내내, 설거지를 하는 내내 그 말 한마디만을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인간을, 뭘 믿고 혼자 남겨놓고 그렇게 발걸음도 가볍게 떠나버린 거였냐고. 뒤통수가 따갑지도 않으냐고.


정말이지 물어보고 싶었다. 뭘 믿고 날 혼자 남겨놓고 떠난 거냐고. 이렇게 모자라고 어설픈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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