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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06. 2023

이른 더위

-388

요 며칠새 때 이르게 푹해진 날씨가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아침에는 환기를 핑계로, 오후에는 공기가 후덥지근하다는 핑계로 한참이나 창문을 열어놓고 지낼 때는 또 그럭저럭 했는데 어제오늘 때아닌 비가 내려 창문을 꼭꼭 닫고 들어앉아 있어보니 며칠새 날씨가 확 후덥지근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제 오후에서 저녁까지가 그 절정이었다. 너무나 덥고 습해서, 선풍기를 좀 꺼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잠시 했다. 지금이 5월 말만 됐어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5월 초부터 선풍기 꺼내는 건 좀 아니지 않으냐는 한 가닥 남은 계절 감각 때문에 차마 그러지까지는 못했다.


내 침대에는 아직도 겨울 이불을 겨우 면한 제법 도톰한 차렵이불이 깔려 있다. 그런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 보면 이불을 엉망으로 걷어차고 자고 있는 것이 벌써 며칠 째다. 원래라면 이달 말쯤에 여름이불까진 아닌 좀 더 얇은 이불을 꺼낼 참이었지만 그때까지 버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계절이 빨리 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맘 때는 이런 식인데 내가 유독 적응을 못하고 있는 건지, 둘 중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작년 이맘때쯤의 나는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을 물어뜯던 현생의 온갖 번거롭고 귀찮은 일들조차 내 사정을 봐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일제히 잠시 잠잠해져서, 나는 그야말로 일조일석에 그를 떠나보내고 이 풍진 세상에 홀로 남은 슬픔과 외로움에 취해 그날그날 하루하루를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에 만족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작년 이맘 때는 어땠는지 그런 것이 통 기억에 없다.


어쨌거나 이제 겨우 5월 초에 접어든 날씨가 이렇게 만만찮으니 올여름은 뭐 안 봐도 알 조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작년 여름도 꽤나 만만찮았었지만 그래도 이 악물고 버티니 찬바람이 나던 것처럼, 지금의 이 힘든 시간들도 언젠가는 그렇게 지나가겠지. 그런 생각을 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버티고 기다리면 결국은 지나가더라는 것이 지난 1년간 내가 체득한 가장 값지고 귀한 교훈이니까.


내 기억에서 휘발돼 버린 지난봄의 기억은 나 혼자 살아낸 올해 봄의 기억에 덧씌워질 테다. 에어컨을 틀지 않으려고 발악하다가 결국은 더위에 항복하고 에어컨을 틀었던 작년 여름의 기억 또한 벌써부터 걱정되는 올여름의 기억에 덮어씌워지겠지. 그런 식으로, 그가 떠나간 이 시간 위에 한 겹 한 겹 다른 기억과 삶을 덧칠하면서 살아가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비록 그 덧칠이 너무나 얇고 보잘것없어서, 손가락 끝으로만 문질러도 벗겨져 버릴 만큼 부질없는 것이라 해도.


그렇게 오늘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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