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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07. 2023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389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그 시절엔 토요일에도 수업이 있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괜히 집에 일찍 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학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집 앞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았다. 집에서 몇 코스 떨어진 대학교 앞 정류장에 내려서, 괜히 서점이며 팬시점 같은 곳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정류장에 면한 육교 앞에 있는 작은 레코드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당시 내 거의 유일한 취미는 용돈을 아껴 모아 좋아하는 테이프를 하나씩 사서 모으는 것이었으므로 저기엔 또 어떤 테이프들이 있을까 구경이나 하러 가볼까 하고 생각했던 것까지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날 내가 알 수 없는 헛바람이 들어 거기까지 가지 않았더라면. 그냥 곱게 집 앞 정류장에 내려 집에 갔더라면. 안 그래도 쪼들리는 용돈에, 이번달은 그냥 테이프 같은 건 사지 말자고 생각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그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내 인생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펼쳐져 있지 않을까. 그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내 인생에 들어온 오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내게는 거창한 꿈같은 게 없었다. 딱히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냥 학교를 졸업하면 더 큰 학교에 가는 걸 서너 번쯤 반복하다가 적당한 직장을 잡고 적당한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적당한 애를 낳고 적당하게 사는 것 정도가 내가 그려볼 수 있는 내 미래의 전부였다. 그리고 감히 말할 수 있지만 내 인생은 그것과는 정 반대에 가까운, 나름의 파란만장과 나름의 일발역전의 연속이었다. 평온, 평탄, 그런 것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었고. 그리고 그런 삶으로 나를 이끌고 간 것은 떠난 그였다. 그런 삶을 살다 보니 가끔은, 아주 예전의 내가 그렸던 그런 평온한 인생이 정말로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지금 이 상태에서 누가 그때 그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려준다고 해도 똑같이 집 앞 정류장을 지나쳐 그 대학교 앞에 내릴 것이며, 서점이며 팬시점을 기웃거리다가 또 그 레코드 가게에 들어갈 거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슬프지만, 지금이 슬프다고 해서 그와 함께 보낸 지난 20여 년의 세월을 깡그리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건 그냥 나라는 인간이 지금껏 살아온 발자취를 통째로 부정하는 거나 진배가 없어서.


이 글을 써놓고,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 아닌 봄비를 맞으며 봉안당에 갈 예정이다. 당신은 나를 만난 걸 후회하냐고, 나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떠냐고 한 번 물어봐야겠다. 가외의 이야기지만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저 문구는 아주 예전에 가전제품 광고에 쓰이던 카피인데 지금 봐도 굉장한 문구다. 광고 문구 이상의 진리이기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인생은 의외로, 아주 작은 선택의 기로에서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요동치기도 하기에. 그날, 하차벨을 누르는 타이밍이 달라지면서 내 인생의 항로가 변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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