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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08. 2023

전세 아니면 월세

-390

"인생 뭐 있습니까? 전세 아니면 월세지."


남들은 별로 재미있어하지 않는 것 같은데 나 혼자 재미있어하는 농담 중에 저런 것이 있다. 한 공중파 메인 앵커 출신의 방송인이 어떤 방송에서 더없이 근엄한 말투로 한 말인데 처음 듣고 나서 너무 재미있어서 온갖 곳에 다 말하고 다니다가 그에게서 적당히 좀 하라는 핀잔을 들었을 정도였다.


저 말이 재미있는 건 '자가'라는 선택지가 아예 없다는 점이다. 인생은 그저 전세 아니면 월세다. 다달이 돈은 나가지 않지만 2년에 한 번씩 전세금을 올려줘야 되거나, 혹은 요즘 같은 뒤숭숭한 시국에 보증금을 걱정해야 하는 전세이거나, 상대적으로 목돈 부담은 덜하지만 매달 적지 않은 돈을 그냥 남에게 퍼줘야 하는 월세이거나. 저 말의 어디에도 내가 내 집에 살기 때문에 집에 관해 나가는 돈은 한 푼도 없는 자가라는 선택지는 없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힘들다. 나는 저 말에서 그런 묘한 위안을 얻는다.


이건희만큼 부자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그런 철없는 소리를 예전에 종종 했다. 그러면 그는 더없이 정색을 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하는 고민이야 푼돈 얼마면 해결이 되니까 그런 속 편한 말을 하는 거라고, 그런 사람들이 하는 고민은 돈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고민이라고, 수중에 돈이 수십수백 억이 있지만 그걸로 해결 안 되는 고민이라는 게 얼마나 끔찍한 것일지 생각해 보라고 했었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역시나 인생은 전세 아니면 월세고, 전세 사는 사람에게는 전세대로의 고민이 있고 월세 사는 사람에게는 월세대로의 고민이 있고 뭐 그런 것이겠다.


그가 살펴준 덕분에 1월 말부터 나를 괴롭히던 문제 하나는 어떻게든 해결이 났다. 그러나 더 크고 중요한 일을 이번주 내로는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지어야 한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고 손발이 덜덜 떨려오지만, 뭐 인생 전세 아니면 월세지 그런 각오로 또 이번 한 주를 잘 버텨봐야지. 그런 생각을 한다.


생각해 보면 그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꼬이고 틀어지고 엎어지고를 반복하다가, 그래도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괜찮은 결말을 맞는 식으로, 우리 삶은 그렇게 흘러갔었다. 이번 일 또한 그러하기를. 그렇게 빌어본다. 이 월요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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