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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10. 2023

이 산이 아닌가벼

-392

나폴레옹에 관한 오래된 유머 중에 그런 것이 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알프스를, 대군을 이끌고 꾸역꾸역 올라가 드디어 정상에 선 나폴레옹이 '이 산이 아닌가벼' 했다는. 2탄도 있다. 그래서 그 먼 길을 다시 내려가 다른 산에 올라갔는데 '아까 그 산인가벼' 하더라는, 뭐 그런 오래된 이야기. 이제 이 이야기는 유머로서의 수명은 이미 오래전에 다했고 이젠 입 밖으로 꺼내 말하는 사람조차도 그리 자주는 찾아볼 수 없지만, 실컷 고생해 놓고 뭔가가 시작점부터 틀어져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자조하는 용도로는 아직도 가끔 쓰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제 그 난리법석을 떨고, 행운을 빌어주십사 징징대는 글까지 올린 그 일은, 또 시간만 조금 더 버는 정도 선에서 끝났다.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어제 결론이 나기로 썩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고 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어제 오전엔 내내 그냥 이대로 멍하니 일이 틀어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마치 기적처럼, 혹시나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부탁해 보자고 생각한 게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져서 나는 또 이 일에 대해 뭔가 생각하고 준비할 시간을 약간 더 벌게 되었다.


어제 그 수습할 방법이 떠오른 것이 너무 극적이어서 어제는 이건 백 퍼센트 그가 귀띔해 주고 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산이 아니던 모양이다. 은근히 귀가 얇고, 뭔가에 한번 꽂히면 앞뒤를 못 가리는 내 성격에 나는 자칫 잘못된 길로 내달려 가려고 했던 모양이다. 어제 오전의 그 몇 시간은, 그렇게 무작정 뭐든 저질러 버리려는 내 뒷덜미를 그가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겨 멈춰 세운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간만에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난 오늘 아침에야 한다. 그 산 아니야. 그 산 아니라니까. 제발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뒤도 좀 보고 살라고.


시간은 여전히 충분치 않고 그 시간을 번다 한들 내가 과연 뭘 할 수 있겠나 하는 걱정은 똑같이 든다. 그래도 가끔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니 또 뭐가 됐든 이런저런 대책을 강구해 봐야겠지. 이 산이 아니면 저 산인지, 그 산인지, 아니면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이 산인 게 맞는데 오르려고 했던 내 방식이 잘못된 것인지.


이럴 땐 좀 속 시원하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해주면 고맙겠는데, 그는 통 그런 식으로는 내게 조언을 주지 않는다. 이젠 좀 너 혼자 알아서 적당히 잘해보라는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어제 글을 읽고 잠깐이나마 나의 행운을 빌어주신 백여분의 독자님들께도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아무래도 이 산이 아닌 것 같아서, 숨 좀 고르고 다른 산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는 말씀과 함께.


브런치를 시작하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글을 쓰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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