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당신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May 11. 2023

불을 끄세요

-393

그가 떠나고 난 후로 내 일상은 소소한 부분들이 많이 바뀌었다. 그중 몇 가지는 이제 혼자서 살아가기 위해 조정이 필요했던 것들이고, 그중 몇 가지는 내가 심리적으로 힘들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버린 습관 중에 잘 때 텔레비전을 끄지 않는 습관이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서울에 올라와 자취를 할 때 잠깐 이런 습관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무서워서' 그랬다. 정확히 뭔지도 알 수 없는 것들이 괜히 무서워서 텔레비전의 적당한 채널을 틀어놓고 그 소음 속에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그 버릇은 그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없어졌다. 그리고 그가 내 곁에 있었던 내내 한 번도 그 버릇은 도지지 않았다.


1년 전 그가 떠난 후로, 나는 다시 너무 조용한 환경에서는 잠을 자지 못하게 되었다.


처음엔 밤새도록 틀어놓을 채널을 고르는 것도 고역이었다. 예능 채널들은 흘러나오는 말소리며 웃음소리를 듣다 보면 자꾸 잘 시간을 놓치게 됐고 스포츠 채널은 무난했지만 가끔 터져 나오는 중계진의 샤우팅과 함성 소리 때문에 얕게 든 잠이 깨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였다. 그러나 그런 귀찮음을 감수하고도 텔레비전을 틀어놓지 않고는 잠이 들지 못했다. 좀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지만 그 증상은 좀체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꼬박 1년이 흘렀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나는 취침등과 텔레비전을 전부 다 끄고도 잘 수 있게 되었다.


아무런 특별한 계기도 없었다. 밖에 나가 좀 쏘다녀 피곤했던 어느 날, 늦은 시간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는 것이 귀찮아졌고 그렇게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을 조금 하다가 그대로 잤을 뿐이다. 그리고 의외로 그날 나는 푹 잘 잤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날도 시도해 보았다. 그런 식으로 며칠째 나는 텔레비전의 자장가 없이 잘 자고, 잘 일어나고 있다. 이 별 것 아닌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 내가 그가 없는 일상에 아주 조금씩이나마 적응해 가는 중이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될 뿐이다. 혹은 무뎌지고 있는 중이거나.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을 썩 졸아하진 않는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내 삶 또한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산이 아닌가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