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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16. 2023

저녁, 맥주 한 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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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게 다 언젠지 실로 까마득한 일로 여겨지지만 예전에 그와 월요일 저녁마다 간단한 안주요리를 만들어서 맥주 한 캔씩을 나눠 마시며 월요일 버티느라 수고했다는 인사를 서로 나누던 때가 있었다. 안주를 만드는 건 주로 그의 담당이었고 마실 맥주를 사 오는 건 주로 내 담당이었는데 내가 고르는 맥주들은 어째 번번이 다 맛이 애매해서 이럴 거면 그냥 괜히 쓸데없는 모험심을 발휘하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특정 브랜드 맥주를 찍어놓고 사 오는 게 어떠냐고 그는 말했지만 난 기어이 편의점 냉장고 문에 한참이나 붙어 서서 온갖 장고를 한 끝에 어디서 보도 듣도 못한 희한한(그리고 대개 맛이 별로인) 맥주를 골라 오는 것으로 엔딩을 맺곤 했다. 그리고 우리의 이 소소한 이벤트는 그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그냥 그렇게, 흐지부지 종료되었다.


그가 떠나고 한동안 술 따위는 쳐다도 보지 않고 살았다. 원래도 그리 술을 좋아하던 성격은 아니었고 그가 떠나고 난 후로는 더욱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혼자 남아 아무도 나를 붙들어 주지 않는 상황에 술이나 담배에까지 손을 대게 되면 정말로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한몫했다. 그리고 올해 정도 들어서야 나는 가끔 힘든 한 주를 보낸 금요일 저녁쯤에 맥주를 간혹 한 캔씩 사다 마시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주는 일이 그렇게 되느라고, 토일월 3일 연속으로 저녁에 맥주를 마셨다. 이건 내 삶이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일까 혹은 내가 상실에 무뎌지고 있다는 증거일까.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영어 속담이 있다. 이제 와서 내가 저녁에 더러 맥주 한 캔 정도를 마시게 되었다고 한들, 그게 내 삶의 뭔가 크고 엄청난 부분이 바뀌었다는 지표는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혼자 지내는 이 시간이 어색하다. 한 번도 넓다고 생각한 적 없었던 집이 요즘은 조금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문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다. 나는 여전히 그런 나날을 살고 있고, 주말 저녁, 혹은 좀 힘든 하루를 무사히 살아낸 저녁 고작 도수 4도짜리 맥주 한 캔을 먹게 된 것을 가지고 뭔가를 말하는 건 아직 한참은 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그만큼이나, 씹어야만 삼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아 프로틴 음료 서너 병으로 하루를 살 던 작년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내가 많이 뻔뻔해지고 무뎌졌다는 것까지는 아무래도 팩트일 것 같다.


이게 맞는 건지, 불쑥 그런 게 궁금해진다. 이런 식으로 무뎌지면서, 하나씩 놓으면서 그렇게 사는 건지. 남들도 다 이러는 건지. 어느 지인의 말씀으로는 그렇게 의가 좋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도 6개월쯤 지나니 알아서 꽃놀이 단풍놀이 다니고 잘들 살더라고 하지만 이래도 되는 건지.


사람 사는 것에 답이 어딨냐고, 네가 그러면 그런 거지, 라고 그라면 그렇게 대답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를. 그리고 아마 제법 오래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복잡한 이유가 아니라도, 혼술은 가급적이면 자제하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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