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당신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May 21. 2023

발등이 타는 순서

-403

대부분이 그러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 생업 역시 '마감 날짜가 있는 일'이다. 마감 날짜가 정해지면 그 날짜까지 일거리를 n분의 1로 나눠서 하루에 일정한 양씩 무리하지 않고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나는 성격상 그러지를 못한다. 남겨놓은 날짜의 반 정도를 까먹고 난 후에야 일을 깔짝대기 시작해서, 그나마도 n분의 1씩이나 해놓는 아니라 시작할 땐 깔짝대는 정도로만 건드려서 마감이 가까워올수록 진작 좀 안 해놓고 뭘 했을까 하고 과거의 나를 멱살 잡아가며 무리해서 달리는 일을 매번 반복하게 된다. 나이나 어리면 아직 일하는 요령이 없어 그렇다는 핑계라도 댈 일이지만 이 나이를 먹고도 이러고 있으니 이쯤 되면 답이 없지 않은가도 싶다.


그 와중에서도 재미있는 건 소위 '발등에 떨어진 불'에도 순서라는 것이 있다는 것인데, 다만 하루 이틀의 차이라도 마감이 멀리 있는 일거리부터 처리하고 싶어진다는 것이 재미난 점이다. 이건 그러니까 시험 전날은 뭘 해도 재미있다는, 심지어 책상 서랍을 정리하고 방청소를 하는 것마저도 재미있다는 그 계통의 감정과도 일정 부분 일맥상통하지 않는가도 싶다. 똑같이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가까운 발목 쪽보다는 먼 발가락 쪽에 타고 있는 불부터 끄게 된다고 할까.


지난 주가 좀 그랬다. 마감 세 개가 한꺼번에 밀려서 어쩔 줄을 모르는 와중에, 제일 크고 시급한 마감 하나만 남겨놓고 덜 중요한 마감 두 개는 어떻게 일정을 맞춰 내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 나니 나는 도대체 이 나이를 먹고 왜 일을 이따위로 하는가 하는 현타가 밀려와 잠시 멍해 있다가, 오늘은 이 이야기나 써봐야겠다 하고 브런치에 하소연하듯 끄적이는 중이다.


나의 이런 습관은 물론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니며, 이 버르장머리를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은 그였다. 이미 몇 번이고 썼었지만 그는 대단히 짜임새 있는 사람으로 본인이 처리해야 될 모든 일을 포털의 캘린더 페이지에 꼼꼼하게 기록해 놓고 실행된 부분은 지워버리고 덧붙여진 부분을 추가하는 작업을 하는 데만도 하루에 일정 시간 이상을 썼었다. 당연히 이런 식의 '닥치는 대로 일하는' 습관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는 제발 좀 안 그러면 안 되냐고 몇 번이나 내게 조심스러운 충고를 했었다. 이렇게 살아도 어찌어찌 다 돼. 오빠 같은 극 J(그러니까 MBTI의 그 J다)는 죽어도 이해 못 하겠지만. 언제나 나는 그런 말로 그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리고 이젠 그가 하는 식으로 뭔가를 다잡아보려 해도 그런 이렇게 하는 거라는 식으로 가르쳐 줄 사람은 곁에 없다.


이젠 어쩔 수 없다. 지금껏 쭉 살아온 방식대로, 그렇게 허둥거리면서 하나하나 땜질하듯 메꿔나가는 수밖에. 똑같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도 발가락과 불목이 타는 속도가 조금 다를 것을 믿고서. 참 사람 안 변한다고 그는 혀를 차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게. 사람은 참 잘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국화는 국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