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당신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May 23. 2023

가상 이사

-405

내게는 주변 사람들 중 거의 아무도 이해를 못하는 좀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일이 바쁠수록 일을 더 늘리는 취미가 있다는 것이다. 생업의 마감에 쫓겨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나 스스로 다른 일거리를 더 만들어서 일에 치여 허덕거리는 상황으로 나 스스로를 몰아간다. 이런 것도 아마 전문가와 상담해 보면 무슨 병적인 기제가 있을 법도 하다는 생각인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다.


가뜩이나 우울한 월요일인 데다가 아침부터 몇 가지 일이 틀어져버려 나는 어제 하루 종을 아무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비관적인 생각에 시달렸다. 그러니까 어제 아침에 쓴 '정말 어떻게든 될까?'라는 화두에 대한 답을 '아니, 아무것도 안 될 거야'로 내려버리고 하루종일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저녁쯤에야 조금 기운을 차리고 이것저것 해야 했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사를 가면 어떨까. 그 정신없던 와중에도.


1년 전 그가 갑작스레 떠났을 때 갔던 몇 군데의 정신의학과에서 '힐 수만 있다면 이사를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을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단서가 붙은 이유는 사람이 앉은자리를 바꾼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고,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집에 별의별 것들이 다 엮여있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들을 전부 차치한다면 이사를 가는 거야말로 이 상황에서 가장 빨리, 가장 건설적으로 벗어나는 방법일 거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당시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당시의 나는 그야말로 멍해진 상태여서, 누군가가 나서서 새로 살 집을 구해서 이사까지 다 해놓고 너는 몸만 들어오면 된다고 말해준대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머릿속으로나마 이사를 해 본다.


멀리 이사 갈 마음은 별로 없다. 나는 지금 사는 동네에 대단히 만족하며, 새로 떠나가 정착할 그곳에서 '적응'하기 위해 굳이 애쓰고 싶지 않다.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 지금 다니는 생활반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래서 집 근처 아파트들 몇 군데의 시세며 평면도 같은 것을 검색해 본다. 나 같은 서민에게 집은 그냥 내 몸 하나 누일 곳이지 그걸로 시세 차익을 남기는 수단 따위는 아니기 때문에 브랜드 같은 건 굳이 보지 않는다. 준공연도가 너무 오래되지만 않으면 되고 쓸데없이 넓을 필요도 없다. 청소하는 데 힘만 들 테니까. 솔직히 나 하나가 머물 곳이라면 24평도 너무 크지 않나 싶기도 하다. 좀 더 작은 곳, 이를테면 주거 가능한 오피스텔 같은 곳은 어떨까. 그런 식으로 생각은 가지를 친다. '몸 누일 곳'에 대한 지극히 범속하고 현실적인 생각들이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을 잠식한 불안을 갉아 없앤다.


이사를 간다면 지금 갖고 있는 것들을 다 싸 짊어지고 가야 할까. 몇 가지는 새로 사야 할 것도 같고 몇 가지는 버려야 할 것도 같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때쯤엔 싫어도 그의 옷이나 신발 같은 것은 정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잠시 생각을 멈췄다. 그 이상은 아직은 조금 버거웠다.


또 모르는 일이다. 나는 가끔, 정말로 뜬금없이, 혹시 이러저러해서 이러저러하게 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고 그 생각이 얼마 후 정말로 현실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지금 나를 옥죄는 이 고민들이 전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지금 사는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20년쯤 전, 수업을 마친 토요일 테이프 하나를 사러 근처 대학교 앞으로 가던 날 나는 오늘 내 인생을 바꿔놓을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었고, 그날 그를 만났다. 그때처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말, 어떻게든 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