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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25. 2023

잉크 30ml만큼의 시간

-407

어제 브런치에도 한 말이지만 작년 4월과 5월 경 내 인생에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요 근래 얼마간은 뭐만 하면 무엇무엇한 지 1년이라는 식의 꼬리표가 붙고 있다, 펜글씨 또한 그중 하나다. 펜글씨를 시작한 것이 작년 5월부터였으니 이것도 이제 꼭 1년이 되었다. 텅 비어버린 오후 시간을 견디다 못해서, 평생의 숙원이던 날림 악필이나 좀 교정해 보자 하고 가르쳐 주는 선생님도 교본도 없이 내 멋대로 시작한 셀프 숙제가 이제 1년을 넘었다. 그리고 아무리 피곤하고 귀찮아도 하루도 거르고 넘어간 날이 없다는 것은 내 소소한 자랑거리 중 하나다.


글씨 교정을 하는 데는 딥 펜이나 만년필 종류가 좋다더라는 말은 또 어디서 들어서, 집에 있는 만년필이라는 만년필 종류는 몽땅 꺼내놓고 하루씩 돌아가면서 쓰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세 자루의 만년필에 맞춰서 잉크도 두 병 더 샀다. 하나는 와인 색이라고나 헤야 할 짙은 보라색이고 하나는 올리브색이라고 이름이 붙은 짙은 카키색이다. 여기에 원래 집에 있던 블루블랙까지 쳐서 총 세 가지의 색깔을 준비해 놓고 하루씩 돌아가며 글씨를 쓰고 있다.


얼마 전부터 와인색 잉크를 채우는 것이 좀 여의치 않아 졌다. 컨버터로 잉크를 한 번에 빨아들이지를 못하고 헛심만 써서 두 번 세 번 용을 써야 겨우 잉크가 채워지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 잉크를 많이 써서, 잉크의 표면이 아래로 많이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궁여지책으로 잉크병 아래 뭔가를 괴어서 삐딱하게 기울인 후에, 남아있는 잉크를 최대한 한 곳으로 모은다. 그러면 그래도 좀 쉽게 잉크가 채워진다. 이 잉크병의 용량이 30ml니까, 나는 30ml짜리 잉크 한 병을 거의 다 써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30ml짜리 잉크 한 병을 다 써가는 중에 내 글씨는 좀 나아지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천천히, 또박또박 쓸 때 한정이다. 마음이 급하면, 다른 생각을 하면 글씨는 여지없이 휘갈겨져서 민낯을 드러낸다. 그렇게 튀어나온 원래 글씨를 바라보는 기분은 착잡하다. 하지만 예전의 내 글씨는 천천히 또박또박 써도 엉망이었으니까. 찬찬히 쓰면 그래도 볼만한 글씨를 갖게 되었다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니까.


이 잉크를 다 쓰고 다른 색깔의 잉크를 살 때쯤이면 나를 괴롭히는 일들이 좀 잦아들고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매일 쓰는 글씨에 집중할 수 있을까. 제발 그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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