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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27. 2023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409

지금보다 머리가 훨씬 잘 돌아가서 뭐든 쉽게 기억하고 어렵게 잊던 시절에 어거지로 머릿속에 쑤셔박은 '문장' 몇 가지가 있다. 아마 지금은 돈을 주고 외우래도 못 외울 것 같은 것들이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같은 긴 시들과 몇몇 길이가 길지 않은 좋은 글들이다. 그중에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에세이가 있다.


이 에세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이런 구절이다.


어린 시절에 살던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특히 저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이라는 구절을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 그가 내 곁을 떠나기 전, 일주일에 한 번꼴로 출근하던 사무실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내가 일을 마치는 시간에 맞춰 나를 데리러 와서는, 지은 지 오래되어 조금만 부주의하면 문콕 사고가 터지기 쉽게 생긴 오래된 지하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무실의 맞은편에는 마트가 있었고, 우리는 종종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이런저런 것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어제 실로 오랜만에 그 사무실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건너편 마트에 들렀다. 뭐 거창한 것은 아니고, 그래도 집 앞 슈퍼보다는 싸겠지 싶은 생각이었다. 요 며칠 날씨가 꽤나 좋았는데도 집 밖으로 거의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살았던 것도 있고 해서 간만에 층마다 돌아다니며 구경도 좀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 건물은 입구부터 뭔가 분위기가 변해 있었다. 이벤트를 빙자한 떨이상품 정리 행사가 입구에서부터 시작되어서 층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1층에 꽤 그럴듯하게 자리 집고 있던 푸드 코드들은 전부 없어졌고 그 자리까지도 이월 재고 상품을 파는 매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건물에서 정상적인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은 지하층에 있는 마트뿐이었다. 이 건물 망했구나. 그런 생각이 확 들었다.


볼 일을 다 보고 돌아가는 내내 기분이 씁쓸했다. 예전 그와 함께 종종 찾아가 본 그 건물은 거창한 이름이 아깝지 않은 꽤나 '삐까번쩍한' 쇼핑몰이었는데. 내가 발을 끊은 것이 길어도 2년이 넘을 리가 없는데. 그 근사하던 건물 하나가 통째로 재고처리장이 되다니. 그래서 나는 실로 오랜만에, 내가 기억하고 있던 사실조차 잊어버렸던 오래된 에세이의 한 구절을 저도 모르게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그는 떠났고 그와 함께 다니던 식당은, 가게는, 장소는 변하거나 없어지는 일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아마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건 변한다. 이젠 알 때도 됐는데, 받아들이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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