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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29. 2023

선풍기를 꺼내다

-411

요즘 날이 왜 이렇게 더워, 하는 말을 5월 중순쯤부터 입에 달고 살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코 옆으로 땀이 맺히고 가끔 비라도 내려 창문도 못 여는 날이면 나도 모를 짜증에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며칠이었다. 선풍기를 꺼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5월 중순부터 선풍기는 오바지, 하고 넘어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집에 더위 타는 반려동물이나 애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러나 그러던 내 얄팍한 결심은 이번 석가탄신일 연휴 3일을 지나면서 결국 박살 나고 말았다.


일단 사흘 내리 비가 내린 것이 가장 컸다. 창문으로 비가 들이치는 바람에 도저히 창문을 열어놓을 수가 없었다. 한 이틀 어찌어찌, 비가 잠시 그칠 때마다 그때그때 창문을 여는 걸로 버텨 보았지만 도저히 무리였다. 아니 내가 도대체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전기세 나오는 에어컨도 아니고 그까짓 선풍기 하나를 못 틀어서 이러고 있나. 그런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그래서 어제는 기어이 두 번 세 번 싸서 다용도실에 처박아두었던 선풍기를 꺼내 날개를 조립하고 시운전을 했다. 그간 한 고민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바람이 시원했다. 그래서 나는 그 며칠간 내가 떤 미련이 잠시 허탈해졌다.


이 선풍기는 내겐 다소 각별한 물건이다. 그가 떠나고 난 후 이젠 나 혼자 뭐든 알아서 해야 한다는 현실을 가장 먼저 직시하게 해 준 것이 바로 이 선풍기였다. 이 선풍기를 사느냐 마느냐, 산다면 얼마쯤 들여서 어떤 선풍기를 살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나는 꽤 며칠간을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러다가 이 선풍기를 샀었다. 그리고 작년에 했던 그 고민의 대가로 나는 이 애매하게 더운 한 철을 별다른 고민 없이, 쌩쌩하게 잘 돌아가는 새 선풍기와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아침에 일어나 몇 가지 정리를 하고 간단한 운동을 하느라 흠뻑 났던 땀도 선풍기를 잠시 틀어놓고 앉아있으니 거짓말같이 식어서, 그 기분은 꽤 상쾌하고 좋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에 좀 꺼낼 걸 싶을 정도로.


지금 내가 지나가고 있는 인생의 굴곡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람의 인생에는 행복도 불행도 총량이 엇비슷하게 정해져 있다고, 그래서 초년에 고생한 사람은 대개 말년에 운이 좋다는 뭐 그런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때 아니게 들이닥친 그의 부재도, 지금 나를 괴롭히는 몇 가지 문제들도, 언젠가 겪고 넘어가야 할 일이겠거니 생각하면 조금은 덜 힘이 들까.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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