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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02. 2023

내가 봤어

-415

세상 사람 다 본 무도를 이제야 한 편씩 보고 있다는 글을 얼마 전에 쓴 적이 있다. OTT를 통해 정주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채널에서 틀어주는 대로 보고 있기 때문에 순서는 뒤죽박죽이고, 그래서 오전애 본 분량과 오후에 본 분량의 멤버가 다르다거나 화면의 톤이 다르다거나 개그 코드가 다르다거나 하는 일은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렇게 뒤죽박죽으로 보는 것은 또 나름의 재미가 있다. '셔플 재생'의 묘미랄까.


그리고 어제는 '조정 특집'을 봤다.


다른 팀들이 모두 골인하고 꼴찌로 남아 꾸역꾸역 레이스를 이어가는 장면에서 에어로 스미스의 I Don't Want to Miss a Thing이 깔리는 그 순간부터 코끝이 찡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노래는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영화 '아마겟돈'의 마지막 장면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작중 내내 딸의 남자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벤 애플렉과 사랑하는 딸과 지구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지구로 돌진해 오는 소행성을 폭파하고 산화하는 장면에서 깔렸던 그 노래다. 이 영화를 나는 그와 함께 극장에서 봤다. 일이 그렇게 되느라고 그랬던지 나는 이 영화를 보기 며칠 전 아버지와 크게 다퉜고, 그래서 이 뻔하디 뻔한 영화를 보다가 저 마지막 장면에서 주변 사람 아무도 안 우는데 혼자 훌쩍거리며 울었다. 그랬던 기억이 있다. 하필 그런 노래가 그런 장면에서 깔린 것에서부터 먹먹해지지 않을 방법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잘 탔어. 내가 봤어.


아, 저 말이 저기서 저렇게 나온 말이구나. '없는 게 없는 무도 유니버스'라는 말도 있지만, 무도를 보지도 않은 나조차도 저 말은 들은 적이 있고 재미 삼아 몇 번 써먹어 본 적도 있다. 그랬던 말이, 저기서 저런 맥락으로 저렇게 나온 말이구나. 그 짧은 말이 주는 울림이 퍽 먹먹해서 아직 무도에 이렇다 할 정이 들지도 않았고 저 말을 한 멤버에게 딱히 호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눈시울이 찡해졌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그 모든 것은 허깨비가 아니라, 그냥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봤다고. 세상 사람 모두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기억할 거라고. 그러니까 그 순간은 없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을 거라고.


그 말은 그런 뜻이었다.


결국 그는 세상에 아무것도 남겨놓지 못하고 갔다. 자신을 닮은 아이 하나조차도. 꿈이 컸고 포부가 컸던 20대 시절의 그를 아는 내게는 참 슬픈 지점 중의 하나다. 그렇지만 나는 봤으니까. 그가 어떻게,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다 갔는지를 나는 봤으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기억할 테니까. 그 사실은 부정되지 않을 거라고.


이 에피소드를 그와 함께 봤더라면 참 좋지 않았을까. 어제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I Don't Want to Miss a Thing을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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