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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03. 2023

라면이 질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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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격은 좋게 말해 무던한 편이고 나쁘게 말해 둔한 편이다. 나는 잘 참는 편이고 쉽게 귀찮아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나는 한번 잡은 루틴은 어지간하면 지키는 편이고 그것에 잘 싫증을 내지 않는 편이다. 그것을 깼을 때 일어날 일들이 번거롭기 때문이다.


그가 몹시 스트레스를 받아했던 일들 중에 식단 짜는 것이 있었다. 도대체 오늘은 뭘 먹고 내일은 또 뭘 먹을 건지, 그걸 가지고 그는 2주마다 한 번씩 옆에 있는 사람이 눈치가 보일 만큼 스트레스를 받아 했다. 그렇게까지 고민하는 사람 옆에서 할 말은 아니어서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저렇게까지 식단 짜는 일로 스트레스 받을 일이 뭐가 있을까. 적당히 며칠 치만 짜놓고 나머지는 라면이나 먹고 때우면 되지. 요즘 라면도 다양하고 맛있게 잘 나오는데.


그렇게 생각했던 벌을 요즘 받고 있는 느낌이다.


한국 사람치고 라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나 또한 그 표준적인 한국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고 상기했듯 귀찮은 걸 세상 그 무엇보다 싫어하는 귀차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 나 혼자 먹겠다고 꾸역꾸역 뭔가를 지지고 볶고 만들어서 요리하는 과정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겹쳐, 지난 1년간 나는 참 이런저런 라면을 신나게도 사다 먹었다. 아마 멀리 떠난 그가 지금 나 사는 것을 본다면 가장 통탄해 마지않았을 지점이 거기가 아닐까도 싶다. 내가 그렇게나 애를 써서 잘해 먹였는데, 고작 1년 만에 하루 걸러 라면이나 끓여먹고 살고 있으니.


그리고 그러고 산 지 만 1년 남짓 만에, 나는 드디어 라면에 좀 물리고 말았다. 하루 걸러 식은 밥을 대충 먹어야 하는 타이밍이 오면 어떻게든 라면 말고 다른 뭔가 먹을 것이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느낀다. 요즘 집에 있는 라면은 예전처럼 끼니를 때우는 용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출출한 저녁 무렵 오븐에 구워서 라면땅을 해 먹는 데 더 많이 쓰이고 있으니 말 다했다. 도저히 답이 없어서 라면을 끓여 먹어야 한다 싶으면, 뭘 어떻게 끓이면 좀 새로운 맛이 날지 나도 모르게 인터넷을 뒤지고 있다. 퍽 무던하고 싫증 같은 걸 안 내는 인간이라고 스스로 자평해 왔는데 그것도 꼭 그렇지만은 않나 보다 싶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은 달도 바뀐 인사도 할 겸, 봉안당에 간다. 가서 그에게 좀 투덜거려 볼 생각이다. 나 원래는 이런 인간 아니었다고. 정말 평생 라면만 끓여 먹고도 살 수 있는 인간이었다고. 그런 사람을 데려다가 온갖 맛있는 거 해 먹여서 까탈스럽게 만들어놨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이런 식으로 중간에 내빼는 법이 어딨냐고. 그 말을 하러. 너는 왜 또 여기까지 와서 꼬장이냐고 그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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