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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07. 2023

내가 그러고 있다

-420

어제는, 식단 상 또 식은 밥이 남아 라면을 끓여 먹어야 하는 날이었다.


우리나라 라면은 맛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다들 이렇게나 라면을 많이 먹는데 그 입맛을 따라가려면 맛있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라면에 조금 물려버린 나는 요즘 라면 봉지만 봐도 그 맛이 저절로 연상돼 영 식욕이 돋지 않는다. 오늘도 그냥, 한 끼 먹고 치운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그렇게 먹어야 하나.


좀 안 그래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 몇 가지를 검색했다. 그리고 그중 레시피 몇 개를 골라서, '다 해보기로' 했다. 파를 썰어 기름에 볶다가 고춧가루 한 큰술을 넣어서 고추기름을 내고, 그 위에 물을 붓고 스프를 넣어서 끓인다. 면은 2분만 삶아서 따로 건져 내놓는다. 남은 국물에 간장과 설탕, 식초를 넣는다. 그 위에 마지막으로 계란을 넣고 표고버섯도 하나 썰어 넣었다. 이래서, 실로 족보도 없는 라면 한 그릇이 완성되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맵찔이여서 원래라면 라면 스프 하나 정도로도 매운맛은 충분한 편이다. 그 위에 고춧가루를 한 큰술이나 넣었으니 물을 좀 넉넉하게 잡았더니 평소 늘 라면을 담던 그릇이 넘치기 직전까지 국물이 올라왔다. 그렇게 먹어본 라면은 나름 색다른 맛이 있었다. 라면이라기보다는 내가 많이 먹어보지 않은 종류의 국이나 탕 요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가 왜 라면 하나를 끓일 때도 온갖 고명을 다 넣고 온갖 양념을 다 해서 끓였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라면이란 편하자고 먹는 음식이 아니냐고, 그런데 그런 라면 하나를 먹는다면서 온갖 채소를 썰고 온갖 양념을 다 해서 결국 그냥 밥 차려 먹는 것과 비슷한 수고를 들이는 그를 나는 늘 의아해했다. 저럴 거면 라면을 끓여 먹는 메리트라는 게 없지 않냐고. 그랬던 나는, 그가 떠난 지 1년 만에 그가 하던 것과 거의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늦된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왕 알 거라면, 그가 있을 때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손에 그렇게 복잡하고 맛있게 끓인 라면을 매 끼니 얻어먹으면서도 그게 고마운 줄도 몰랐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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