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
어제는 미팅이 있어서 집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다녀왔다. 무려 초행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초행길까진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그나마 그의 차를 얻어 타고 한 번 가 본 것이 전부인 곳인지라 내게는 초행길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차를 얻어 타고 갔을 때는 뭐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나는 조수석에 편안하게 앉아서 그의 말 상대나 해 주면 됐었고 그러다가 졸리면 꾸벅꾸벅 졸기만 하면 됐었다. 그러나 혼자 가는 길은 그렇지 않아서, 일단 포털의 길 찾기 서비스로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디에 내려 뭘로 갈아타야 하는지를 유심히 봐두어야 했다. 부산에 살던 시절 대학교 4년 내내 하루 두 시간씩 지하철에 시달린 이후로 웬만하면 지하철을 안 타려고 애쓰고 있긴 했지만 어제는 버스 환승만을 고집했다가는 길에 버리는 시간이 너무 걸어져서 어쩔 수 없이 중간에 30분 정도는 지하철도 타야 했다.
그렇게 떠먹기 쉬운 안내까지 다 받아 놓고도 나는 하차벨을 누르지 않아 내릴 데를 지나친다든가 갈아타는 정류장 방향을 잘못 알아 반대편으로 10분쯤 걷다가 그 사실을 눈치챈다든가 하는 소소한 삽질을 어제 하루동안 한 서너 번쯤 했다. 화룡점정은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마지막 버스를 탈 때였다. 가장 안전하게 집 앞까지 오는 버스의 도착 예정 시간이 20분이나 남은 걸 보고 지레 안달이 난 나는 집 근처 다른 정류장에 서는 버스를 오는 대로 집어탔다. 그러나 그 버스는 내가 타려던 버스가 아니라 그 뒤에 -1번이 붙은 다른 버스였다. 그래서 나는 영 엉뚱한 정류장에 내렸고, 거기서 집까지 돌아오느라 또 온갖 삽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사이 잠시 멎어있던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어제 입었던 옷과 신발까지를 몽땅 버리고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발뒤꿈치 쪽에 신발에 쓸린 상처가 생겼다. 그가 있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새삼 그의 덕분으로 얼마나 많은 편한 곳들을 신경 하나 쓰지 않고 쉽게 다녔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해결해야 하는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고 사는 건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한 장마의 초입이다. 꾸역꾸역 버티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더욱 그런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1년 중 가장 버텨내기 쉽지 않은 이 시기, 더 이상의 삽질 없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기를. 거기 간 짬밥이 얼마 안 돼 로또 1등 번호 같은 걸 찍어줄 수 없는 거라면 그런 거라도 좀 해주기를, 그의 사진에 대고 가벼운 생떼를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