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빨래 덕분에 에어컨 켭니다

-453

by 문득

점심때가 되어 또 한 끼 적당히 먹고 치우려는데 창 밖으로 실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쎄했다'. 왠지 밥 먹다 말고 숟가락을 팽개치고 비명을 지르며 창문을 닫으러 집안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래서 나는 첫 술을 뜨기 전에 열어두었던 창문을 모두 닫고, 창가에 내놓았던 화분도 다 안으로 들였다. 아닌 게 아니라 밥을 절반쯤 먹었을 때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선견지명에 내심 뿌듯해하며, 뿌옇게 흐려진 창가를 내다보며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내린 비 덕분에 어제 날씨 자체는 그렇게까지 덥진 않았다. 선풍기 정도면 딱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날씨였다. 그러나 어제는 빨래를 하는 날이었다. 장마철의 가장 큰 곤욕 중의 하나는 빨래가 잘 마르지 않고, 빨래에서 쉰내 비슷한 쾨쾨한 냄새가 나는 것이다. 그러지 말라고 일부러 온수를 틀어놓고 더운물에 빨래를 하고 냄새가 덜 난다는 실내건조용 세제를 쓰고 섬유유연제도 아낌없이 넣지만, 그런 정도로는 언제나 부족했다. 그런 건 미봉책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어제도 빨래를 핑계로 에어컨을 켰다.


올해 우리 집의 첫 에어컨은 6월 말일인지 그랬다. 때 이르게 찾아온 열대야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에라 이렇게 산다고 누가 너 퍽 알뜰하게 사는구나 하고 칭찬해 줄 것도 아닌 바에야 미련 떨지 말자며 냉큼 개시를 해 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개시를 해 놓고도, 나는 아직도 에어컨을 턱턱 틀지 못한다. 선풍기로 견딜 수 있는 날은 어지간하면 선풍기로 견뎌 보고자 노력하고, 날씨가 왜 이렇게 더운가 하고 확인해 본 핸드폰의 기온이 32도 정도가 되면 마지못한 척하고 에어컨을 켠다. 그러나 빨래를 하는 날은 조금 유해져서 오늘 정도면 선풍기로 버틸만한데 싶은 날도 그냥 에어컨을 켠다. 내가 쐬려고가 아니라 빨래를 말려야 한다는 핑계로.


이런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은 가끔 스스로 보기에도 좀 웃길 때가 있다. 성질 고약한 시어머니라도 모시고 살아서, 내 아들을 잡아먹어놓고 속 편하게 에어컨이나 틀고 사느냐며 나를 구박할 것도 아닌데 도대체 누구 눈치를 보느라 에어컨 하나 트는 것에도 이렇게 끊임없이 핑계를 찾는가 하는 생각에 가끔 실소가 나오기도 한다. 어차피 그렇게 에어컨을 틀고 부과되는 전기요금 또한 누가 대주는 게 아니라 다 내가 스스로 감당하는데도.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아직은,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에어컨을 트는 이런 생활에 익숙하지 못하니까. 이번주는 내내 비가 온다는 모양이니, 그중에 며칠은 또 빨래를 말리는 핑계로 에어컨을 별다른 가책 없이 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게는 아직은 그런 핑계가 필요한 모양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안 겪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