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미인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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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백합을 사다 꽂은 것이 오늘로 5일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실감한다. 크고 예쁜 꽃은,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여놔야 한다는 것을.


자잘하고 올망졸망한 꽃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아름다움이라는 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꼭 그것과 마찬가지로, 크고 화려한 꽃들이 내뿜는 강렬한 존재감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안개꽃 한 다발과 만개한 작약 서너 송이가 커버하는 공간은 놀랍게도 거의 비슷하다. 보기에 따라서는 후자가 더 크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크고 예쁜 꽃'의 지는 모습에 번번이 식겁하면서도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수국의 경우는 너무 쉽게 시들어 버린다. 수국은 꽃집을 하시는 '프로'들에게도 비위 맞추기 쉬운 꽃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수국이 시들면 대야든 세면대에든 물을 받아놓고 하룻밤 정도 담갔다가 꺼내면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는 말이 인터넷에 종종 올라와 있지만 내가 해 본 바로는 별로 그렇지 않았다. 단정적으로 안 통한다고까지 말할 수 없는 건 내 방법이 어딘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고 아주 오래전에 딱 한 번 해본 거였던지라 나 스스로도 표본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산 수국은 딱 3일을 갔고, 그 기록은 지금껏 우리 집을 거쳐간 60여 가지의 꽃들 중 가장 짧은 것으로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튤립의 경우는 멀쩡하게 잘 버티고 있다가, 정말 한 방에 시들어 버린다. 주군이 도망쳐 숨어있는 절 앞을 지키고 서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 선 채로 죽었다는 일본의 무사 무사시보 벤케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꼭 그런 느낌이다. 시드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겠다는 듯한 그 마지막은 장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물론 아침에 자고 일어나 비몽사몽한 기분으로 꽃병에 물을 갈러 갔다가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꽃술만 남게 되는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은 그만큼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작약은 시드는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다. 아마도 봉오리때와 갓 만개했을 때의 모양이 너무 화려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그렇게 보이는 것도 있을 것 같다. 활짝 핀 작약은 그야말로 당나라 시절의 중국 미인도 같다. 그러나 그 곱던 꽃잎은 만개한 그날부터 하루하루 색이 빠지기 시작해서, 마치 사람의 머리가 세듯 새하얗게 변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를 착잡하게 만든 크고 예쁜 꽃들 가운데서도, 사실 나는 작약의 최후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단순히 '시든다'는 느낌도 아닌, '죽는다'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른다.


해바라기도 시드는 모습이 안 좋은 편에 속한다. 해바라기는 시드는 모습이 충격적이라기보다는 너무 초라해서 서글퍼진다. 굵고 튼실한 꽃대에, 정말로 태양처럼 위세가 당당하던 그 꽃이 꽃잎부터 시들어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툭툭 떨어지며, 급기야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마음이 스산해진다. 어린 시절 남몰래 좋아했던 연예인이 다단계 사기 같은 것에 연루돼 기소되었다는 뉴스를 듣게 되는, 그런 기분에 가깝다고나 하면 될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합은 '목이 부러진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만개한 백합은 점점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는데, 꽃의 크기에 비해 그리 굵고 튼튼하지만은 않은 꽃대가 그 꽃을 지탱하지 못해 말 그대로 목이 부러진다. 목이 부러져 흰 꽃이 아래로 처지고, 그 사이로 꽃술이 비어져 나와 있는 모습은 딱하다기보다도 처절하다는 느낌까지 준다. 월요일에 사 온 백합 일곱 송이 중 세 송이가 그런 식으로 먼저 제 수명을 다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차라리 제 수명을 다하고 시드는 편이 얼마나 인도적인가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스파이더맨은 늘 말하기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크고 예쁜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크고 단단한 마음의 각오가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의 경우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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