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에어컨이 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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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여름이라지만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제법 버틸만한 날 말이다. 아슬아슬하게 비는 오지 않아서 창문을 열어둘 정도는 되고, 덕분에 해도 나지 않고 공기의 온도도 좀 내려가서 의외로 살만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 물론 그런 날이라고 해도 기온은 대개 29도 내외를 오락가락한다. 그래도 32도 33도 정도룰 우습게 넘나드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그런 날이.


어제는 그런 하루였다.


억수같이 비가 오고 난 다음 날이었다. 비는 사이사이 오락가락했지만 올 때만 잠깐 창문을 닫는 정도로 커버가 가능할 정도여서 선풍기 정도면 충분했다. 마침 어제는 빨랫감도 딱히 나오지 않아 빨래도 안 했고, 그래서 에어컨 바람을 쐬어서라도 말려야 할 상전 같은 빨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제는 에어컨 리모컨에 손도 대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이런 날은 주는 것 없이 뿌듯해진다. 그까짓 하루 동안 에어컨을 튼다고 전기료가 수십만 원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하루 동안 에어컨을 안 튼다고 지금껏 쓴 전기료가 다 없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도. 생각건대 아마 어제 하루 에어컨을 쉼으로써 나는 그제와 그 그저께 하루종일 억수 같은 비가 오는 바람에 덥고 습한 집안에 갇혀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틀고 산 부채감을 아주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건지도 모른다. 인터넷을 다니다가 본 재미있는 글 중에 그런 글이 있었다. 닌텐도 스위치는 40만 원 정도 하지만, 그걸 한 번 사면 1년 내내 매일 할 거니까 하루에 천백 원 꼴의 비용이 지출되는 셈이고 그걸 2년, 3년 하는 식으로 계속 나누다 보면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거나 다름이 없으니 0원에 사는 셈이라고. 이게 무슨 '맛있으면 0칼로리' 같은 얘긴가 하고 한참을 웃었지만 그 기저에 깔린 심리는 이해한다. 그런 식으로라도 닌텐도 스위치를 사는 걸 합리화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나 또한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나만을 위해 에어컨을 틀고 사는 것에 상당한 죄책감을 느끼는 중인 것 같으니까.


오늘 날씨도 어제의 연장선이다. 나 혼자만이라면 어떻게, 창문으로 들어오는 다소 습한 바람과 선풍기로 견딜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 못한 빨래를 해야 해서, 오늘은 에어컨 개점휴업은 실패로 그칠 듯하다. 에어컨 하나 켜는 문제를 가지고 매번 이렇게 머리가 아프대서야, 심지어 그 이유가 전기료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도 아닌 이런 나날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갈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한다. 그러게, 내게는 아직도 매사에 '핑계'가 필요한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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