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만년필에도 연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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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하루에 30분씩 하는 펜글씨 연습을 하는데 쓰는 만년필은 총 세 자루다. 그리고 이 세 자루의 만년필은 각각 다른 잉크를 쓴다. 그중 하나는 45ml짜리로 조금 양이 많아서 논외지만, 나머지 두 병은 같은 브랜드의 같은 제품으로 색깔만 다를 뿐 똑같이 30ml 용량이다. 그런데 남아있는 잉크의 양이 확인하게 다른 걸, 어제 알게 됐다.


두 만년필은 거의 사용하는 정도가 똑같다. 사흘에 한 번씩, 천 자 내외의 짧은 글을 다섯 페이지 쓰는 데나 똑같이 사용할 뿐이다. 두 잉크는 같은 날 샀고 같은 시기에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남아있는 용량이 하나가 다른 하나의 절반 정도밖에는 안 되어 보인다.


많이 남은 올리브색 잉크를 쓰는 만년필은 세 자루 중 제일 신참이다. 길이 덜 들어서 그런지, 아직도 글씨를 써 보면 사각사각한 느낌이 있고 가끔은 종이가 긁히는 듯한 느낌도 난다. 가끔은 잉크가 다 됐나 하고 배럴을 열어보면 아직도 잉크가 꽤 많이 남아있을 때가 있고, 오늘쯤에는 잉크를 넣어야겠구나 싶은 적은 잉크양으로도 무난히 그날 하루 연습치를 다 써내곤 한다. 이렇게 적고 보니 이 만년필은 정말 잉크를 안 먹는 만년필이 맞구나 싶다.


적게 남은 와인색 잉크를 쓰는 만년필은 반대로 세 자루 중 제일 오래됐다. 닙도 제일 굵고, 그래서 그래서 글씨가 부드럽게 써진다. 세 자루 중 글씨를 썼을 때 가장 예쁘게 나오는 것도 이 만년필이다. 그러나 이 만년필은 여러 가지로 좀 구식이어서 잉크를 넣는 방식도 좀 불편하고 배럴의 용량도 다른 두 자루보다 적어서 잉크도 자주 보충해야 하고 닙이 굵은 탓인지 한 번에 줄어드는 잉크의 양도 많다. 이것 또한 이렇게 적고 보니 이 만년필이 잉크를 많이 먹는 건 당연하구나 싶기도 하다.


똑같이 사서 똑같은 일에 똑같이 쓰고 있는 잉크인데도 남은 양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조만간 와인색 잉크는 다 떨어지지 않을까 싶을 만큼밖에 남지 않았다. 오는 건 순서가 있어도 가는 건 순서가 없다던가. 불쑥 그런 말을 떠올린다. 내 곁에서 천년만년 같이 살 것처럼 말해놓고 그렇게 불쑥 가버린 사람을 생각한다. 그러게, 살아있을 때 적당히 게으름도 부리고 귀찮은 건 안 보이는 척 못 본 척하면서 살았으면 좀 나았을 텐데. 매사 그렇게 부지런하니 빨리 닳아버린 게 아니겠냐고, 그런 귀먹을 투정을 한다. 장맛비가 잠시 멎은 어느 더운 여름날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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