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여름이니까, 아이스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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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저녁이 되면 커피 한 잔을 마신다. 그건 내게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냈다는 하나의 사인이다. 이때 마시는 커피는 주료 원두커피지만 뭔가 좀 더 진하고, 달고, 텁텁한 것이 땡기는 날이 있다. 그럴 때는 집에 상비로 재놓는 커피믹스를 가지고 타는 아이스커피가 제격이다.


만드는 레시피도 뭐 아주 간단하다. 믹스를 세 개 정도 뜯은 후에 뜨거운 물을 믹스가 겨우 녹을 만큼만 부어 녹인다. 그리고 얼음을 많이 넣은 컵에 이 녹인 '원액'을 넣고, 우유와 생수를 대개 2: 1 정도의 비율로 붓는다. 원래는 전부 우유를 부어서 마셨지만 내가 커피마실 때 쓰는 텀블러가 커서 그런지 전부 우유로만 채우면 맛이 너무 텁텁해져서 얼마 전부터는 생수를 조금 섞고 있는데 내 입에는 이 편이 좀 더 깔끔하면서도 우유도 아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난 후에 휘휘 저어서 마셔주면 아주 달달하고 녹진한, 그야말로 한국 사람의 입맛에 딱 맞는 아이스커피가 된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재미있는 예능을 틀어놓고 그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기분은 잠시 내가 처해 있는 모든 번뇌와 괴로움을 잊게 한다. 감히 그럴 정도의 맛이다.


아 아이스커피가 재미있는 것은 더치커피나 에스프레소 원액이 우유를 타서 마시는 라떼와는 아예 다른 음료라고 해도 좋을 만한 맛이 난다는 것이다. 사실 커피믹스의 맛은 '진짜' 커피의 맛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서, 벚꽃에는 사실 이렇다 할 향이 없고, 사람들이 벚꽃향이라고 알고 있는 향은 어느 조향사가 사람들이 벚꽃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를 생각해 이것저것 섞어서 만들어낸 향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그렇거나 말거나, 그 달고 텁텁한 믹스의 맛에는 원두커피에는 없는 정취와 향수가 있는 것도 사실이어서 요즘은 커피 믹스를 그렇게 자주 먹지도 않으면서도 집에 20개들이 한 통씩은 꼭꼭 구비해 놓고 있다.


사실 지금의 이 아이스커피 레시피는 내가 내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이다. 예전 그가 있던 시절의 아이스커피는 뭘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가 했던 것도 지금 내가 하는 것과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는 것 같지도 않은데(애초에 아이스크림 같은 반칙성 재료를 넣는 게 아닌 다음에야 커피믹스로 아이스커피 만드는 어떤 기상천외한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여름 저녁 그가 타 주는 아이스커피는 어느 카페에서 이런 걸 돈 주고 사 먹을 수 있으랴 싶을 만큼 맛있었다. 요즘 내가 타 마시고 있는 아이스커피는 그걸 흉내만 낸, 일종의 카피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이 별 것도 아닌 아이스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도 그를 생각하게 된다.


날이 덥다. 나는 여기서 어설프게나마 탄 아이스커피도 마시고 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이 사람은 거기서 뭘 어쩌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워낙에,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안 하던 사람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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