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식물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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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요즘도 그런 걸 그런 식으로 배우는지 모르겠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국사 시간에, 삼국 시대를 배울 때의 일이다. 전성기는 차례대로 백제가 4세기, 고구려가 5세기, 신라가 6세기. 이 순서는 대개 한강유역을 차지한 순서와도 일치하고 왕권이 강화된 순서와도 일치하며 거의 유일하게 불교가 수용된 순서만은 조금 달라서 고구려와 백제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수용하고 신라만 150년쯤 지나서 수용한다. 이런 것을 달달 외웠었다. 유독 늦었던 신라의 불교 수용과 관련해 이차돈의 순교를 배웠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붉은 피가 아니라 젖 같은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토착 신앙이 유독 강해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신라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비로소 불교를 믿기 시작했더라, 하는 뭐 그런 이야기까지.


요즘 가뜩이나 사는 게 머리 아픈 나를 은근히 신경 쓰게 만드는 일 한 가지가 있다. 작년에 들여온 무화과 녀석이 영 상태가 미령하신 것이다. 작년과 올해 내가 녀석을 다루는 방식에 딱히 차이가 나는 것도 없고 우리 집의 일조량이라든지 통풍에 무슨 변화가 생겼을 리도 없는데, 작년엔 물만 먹고도 그지없이 튼튼하게 잘 자라던 녀석이 올해 들어 자꾸만 잎 끝 부분이 갈색으로 변하는 증상을 보이고 있어서 이걸 이렇게 놔둬서 될 일인가 하는 생각을 물을 줄 때마다 하던 참이었다. 자주 가는 꽃집 사장님의 말씀으로는 가장 흔한 이유가 과습이니 물 주는 주기를 하루 정도 늘려보라고 하셔서 그렇게 해보고 있지만 별반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제도 무화과에 물을 주는 날이어서 물을 주고 이리저리 살펴보니 거의 모든 잎 끝이 조금씩이나마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 이래선 안 되겠다. 나는 즉시로 인터넷을 뒤지고 여기저기 몇 군데 질문글을 올렸다. 과습이 문제일 거라는 답변이 가장 많긴 했다. 통풍이 문제일 수 있으니 선풍기나 서큘레이터를 틀어놓고 바람을 쐬어주라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갈색으로 변해버린 잎 끝은, 이미 조직이 죽어버려 되살아날 수도 없고 그냥 두면 그 부분을 회복하기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나 소모하게 될 뿐이니 잘라주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큰 맘을 먹고, 그야말로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애지중지해왔던 무화과의 이파리에 '칼'을 댔다.


아침마다 꽃대 자를 때 쓰는 원예용 가위로 이파리 끝부분을 잘라냈다. 잘린 부분에서 희뿌연 진액이 나왔다. 마치 피처럼. 아. 이래서 이차돈이 순교한 설화에 그의 피가 붉은색이 아니라 흰색이었다는 전승이 붙은 것이구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진액은 이파리를 잘리는 자리마다 방울방울 배어 나왔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프지. 그런데 이거 놔둬 봐야 낫지도 않고, 너만 더 힘들어진대. 그래서 자르는 거니까, 조금만 참자. 저와 나 사이에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는데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며 이미 바삭바삭하게 말라버린 잎 끝들을 하나하나 잘라냈다. 그리고 이파리 위로 물을 흥건하도록 뿌린 후에, 방으로 모셔놓고 선풍기를 한참이나 틀어 주었다.


부디 꽃집에 가져가서 뿌리를 파 보는 대수술을 하기 전에 이 정도 선에서 잘 좀 회복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어쨌거나 녀석이 무사하게,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는 건 요즘 내 삶에 몇 안 되는 기쁨 중의 하나기 때문이다. 다시는 피 볼 일이 없도록, 그래서 너도 힘들지 않고 나도 마음 아프지 않도록, 조금만 더 힘내달라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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