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혀둔 글의 유통기한

-15

by 문득

브런치에는 '서랍'이라는 메뉴가 있다. 쓰다 말았거나, 다 썼지만 어딘가 완성도가 미진한 글들을 발행 전 상태로 보관해 놓을 수 있는 일종의 임시보관함이다. 나는 이 서랍을 쓰고 싶은 이야기들을 쌓아놓는 일종의 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뭔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나면 제멋대로 붙인 제목―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때 대충 붙인 제목 이상의 제목을 찾지 못해 그 대충 붙인 제목 그대로 글을 발행하는 경우가 많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에 대충의 기승전결, 혹은 키워드 몇 줄 정도나 후다닥 써서 저장해 놓고는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정서해서 발행하는 식이다. 이렇게 재 놓은 소재가 많을수록 오늘은 또 무슨 얘기를 써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이런 식으로 묵혀둔 글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였다.


어제는 브런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시즌 2를 시작한 이후 잘 들어가지 않던 서랍에 한 번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나는 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더. 그렇게 모아두었던 글의 대부분은, 나조차도 그게 무슨 이야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이 주제로 무슨 글을 어떻게 풀려고 했던지, 그런 것들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나는 한참을 멍하니 그 낯선 키워드들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물론 서랍 속에 든 그 모든 글들을 다 알아볼 수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개중엔 제법 기승전결을 갖춰서 남겨놓은 글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글들은 대부분, 내가 한참 그를 잃어버린 상실감과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그 무렵에 쓰여진 글들이어서 발행할 타이밍을 한참 놓쳐버린 글들이었다. 맛있는 거라고, 조금 이따 먹어야지 하고 애써 아껴두었던 음식에 곰팡이가 핀 것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마음을 먹고 이젠 더 이상 글로 쓸 수 없을 것 같은 소재거리들을 전부 지웠다. 그러고 나니 서랍 속이 순식간에 휑해져, 나는 조금 '쫄리는' 기분이 되었다. 뭐든지 모아서 재 놓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구나. 무엇이든, 그걸 할 수 있는 타이밍이라는 건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는 거구나. 그러고 보니, 이런 말을 지금에서야 또 반복하고 있는 너도 좀 우습다. 이 이야기야말로 이 브런치를 시작한 이래 내가 내내 하고 있는 말이 아니던가 말이다. 할 수 있을 때 하라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고. 옆에 있을 때 잘하라고.


영원할 수 없는 건 한낱 글도, 심지어는 제대로 다 쓰지도 않은 순간순간에 떠오른 글감들에 불과한 그 토막글조차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날짜가 지나면 먹지 못하고 버려야 하는 건 냉장고 속에 든 음식들만 그런 건 아니다. 어쩌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마 다 그런 것들일지도 모른다. 이 순간도 흘러가고 있는 내 인생조차도. 그러게, 사는 일에도 정해진 유통기한이 있어서, 이 일은 이때가 지나면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고 누가 좀 친절하게 미리 알려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다.


201737267.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힘내요, 잘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