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밥 먹으라 부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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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사람들은 모두 괜찮다고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 있다. 비 오는 날엔 우산이 있으니까 괜찮고 잠이 안 오는 밤에는 술 한 잔이 있으니까 괜찮고 광대가 줄을 타다 떨어져도 어차피 서커스니까 괜찮고 철새들이 죽어가도 그건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다는, 그렇게 모든 게 다 괜찮아도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 어딘가에서 울고 있다는 그런 글이었다. 분명히 산문이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시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글이었다. 나는 그 글을 중학생 정도 되었을 때 제사를 지내러 갔던 외갓집의 사촌 오빠 방에 있던 어느 낡은 책에서 처음 읽었다. 세상이 뭔가 하는 의문조차 감히 가져보지 못했던 어린애의 눈에도 그 글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오빠에게 그 책을 빌려가도 되는지를 물었고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에도 이미 낡을 대로 낡아 책장이 벌어지기 시작한 그 책을 굳이 돌려주려고 애를 쓰지 않았고 오빠 또한 돌려달라는 재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책은 아주 오랫동안 내 책상 책꽂이에 다른 책들과 함께 꽂혀 있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고 이어령 선생님이었고 그 글의 제목은 '식물인간'이었다.


내가 막 대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고 신해철 님이 진행하던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와 나는 그 프로그램의 애청자였고 다음날 학교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어제 나온 사연들 이야기를 하며 웃곤 했었다. 밤 12시에 시작해 새벽 2시에 끝나는 그 프로그램은, 2부가 시작되는 새벽 한 시 무렵 그날 온 사연들 중 좋은 글들을 신해철 님의 그 낮은 목소리로 내레이션 하듯 읽어주는 코너가 있었다. 나는 그 코너에 '식물인간'이라는 저 글을 보냈고, 방송을 탔고, 구두 티켓 하나를 받았다. 그런 적이 있었다.


그랬던 이어령 선생님이 얼마 전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분의 마지막 인터뷰가 책으로 나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한 번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에 그가 떠났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나는 그 책을 다시는 읽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가 떠나간 후 나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들의 죽음에서조차 눈을 돌리게 되었으므로.


그러던 중 어제 브런치에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대한 글 하나를 읽었다.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 그분은 죽음을 그렇게 정의했다. 바깥에서 친구들과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으면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기다렸다는 듯 등 뒤에서 들려오던 엄마의 이제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으라던 목소리. 그냥 그것이라고. 그냥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우리 모두는 별의 자녀들이다. 요즘 읽고 있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그런 문장이 나온다. 이 말은 어떤 로맨틱한 수사 같은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던 이 우주에 처음으로 수소, 질소, 산소 같은 것들이 생겨났고, 그것들이 모여 별이 되었고 생명이 되었고 인간이 되었으므로 결국 우리는 별의 자녀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니까 별에서 태어난 우리는, 온 우주의 생명을 1년으로 잡았을 때 고작 4초 남짓을 살고 가는 우리는 그 4초의 시간 동안 바깥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셈이 되는 것이다.

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은 났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그가 아무도 모르는 춥고 외로운 곳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그냥 밥 먹으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간 거라면. 그리고 이 밤이 지나고 다시 날이 밝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라도 또 만나서 같이 놀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그냥,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간 그의 딋모습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 게 아닐까.


도저히 하루에 100 페이지 이상은 읽어지지 않는 '코스모스'를 끝내면 조금은 용기를 내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어야겠다. 그리고 조금 더 힘을 내서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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