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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밥을 먹을 때 자주 틀어놓는 코미디 프로그램 중에 그런 코너가 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짓을 하는 젊은 연인 한 쌍 옆에서 한 노부부가 니들이 하는 그거 우리도 젊을 때 다 해봤다고 놀리는 식이다. 남자가 오늘 너무 많이 돌아다녀 다리가 아프니 모텔에서 잠깐 쉬었다 가자고 여자에게 말하면 듣고 있던 노부부가 그거 우리도 다 해봤는데 "쉬러 들어가 놓고 못 쉬게 된다"고 딴죽을 거는, 뭐 그런 식의 말장난으로 구성되어 있는 코너다.
크리스마스가 사나흘쯤 남으면 으레 동지다. 예수가 태어나던 그 무렵만 해도 사용하던 달력이 현재의 그레고리력이 아닌 율리우스력이었고 그래서 당시의 동지는 12월 22일 무렵이 아니라 12월 25일 무렵이었다던가 하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그랬으면 크리스마스 때 먹는 음식은 케이크가 아니라 팥죽이 될 뻔 했겠고 케이크 값은 굳었겠구나 하는 때 묻은 생각을 좀 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남들 하는 건 어지간하면 같이 묻어서 하는 게 좋다'던 그의 말대로, 나는 오늘도 동지 팥죽이라는 걸 한 번 먹어볼 참이다. 그가 있을 때 가던 양평 팥죽집까지 갈 일은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내 손으로 팥을 사다 삶아서 죽까지 쑬 정성도 없기는 매한가지다. 이럴 땐 그저 어떤 요식업계의 대부인 분의 말씀마따나 '시켜 먹는 게 최고'다. 가뜩이나 연일 체감온도가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맹추위가 기승을 떨치고 있으니 마침 핑계도 좋다. 그냥 시켜 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짓날 팥죽 시켜 먹자는 생각을 하는 건 나 혼자만은 아닐 터였다. 그간의 여러 가지 잡다한 경험 상, 남들 하는 건 대충 묻어서 같이 하는 게 좋다고는 해도 날짜가 겹치는 날 같이 몰려드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복날 삼계탕을 먹으러 간다든가,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사러 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동짓날도 아마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래서 나는 나름 잔머리를 굴린 끝에, 어차피 시켜서 먹을 거면 하루 전날 주문해서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동짓날 그걸 끓여서 먹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대단히 으쓱해졌다. 이거 정말 기가 막힌 생각 아니냐고. 나는 스스로의 잔머리에 감탄을 늘어놓으며 하루 전날인 어제 미리 팥죽을 시켜서 한 김 식힌 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피크타임도 피해서 주문한 탓인지 죽은 주문한 지 고작 30분 만에 집 앞까지 왔다. 얼마나 쉽고 편하냐고, 내일 배달 한 번 시켜 봐. 한 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될걸. 그의 액자에다 대고 이렇게 으쓱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브런치에 글 한 조각을 쓰기 위해 내 브런치를 둘러보다가 나는 이 "하루 전날 팥죽을 미리 배달시켜서 식혀놨다가 동지 당일에 데워서 먹는" 방법을 이미 작년의 내가 생각해서 시행해 봤음을 알고 몹시 머쓱해졌다.
내가 지금 딴에는 뭔가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고 혼자 의기양양하고 있는 것들은 아마도 대부분, 그가 먼저 '다 해본' 것들일지도 모른다.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인은 다 아는 걸 이제야 찾아내고 혼자 으쓱해하는 걸 구경하고 있으면 재밌냐고, 괜히 좀 툴툴거려라도 보고 싶은 아침이다. 사람이 말이야. 치사하게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