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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 운운하는 것이 한국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면 나는 아마도 서울의 지구 정 반대편에 산다는 아르헨티나 사람까진 아니어도 그 중간쯤인 유럽 어딘가에 사는 사람 정도는 될 것이다. 나는 김치 없이는 라면을 못 먹는다거나 한국 사람은 역시 김치가 있어야 된다는 말들에 별로 동감을 하지 못한다. 그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역시도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정도는 아니었고 그래서 우리 집 냉장고에는 김치가 없는 날도 많았다. 둘 다 입맛이 이러니 당연히 김치 담그는 법 따위도 몰랐다. 사다 먹자고 해도 김치의 가격이라는 게 생각보다 제법 비싸서 더 그랬다.
그래도 그는 웬만하면 4, 500 그램 정도 되는 작은 포장 김치라도 되도록이면 사다 놓고 반찬으로도 쓰고 요리할 때도 이리저리 쪼개가며 꽤 알뜰하게 썼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가 그런 뒷손이라고는 없는 인간이어서 그가 떠난 후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본의 아니게 김치를 쳐다도 안 보고 지냈다. 가끔 김치볶음밥이나 김치찌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거 하나 해 먹자고 싸지도 않은 김치를 일부러 사느냐는 생각에 다다르면 그냥 말자는 식으로 생각이 굳어지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도 별로 불편한 줄을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가 지난주쯤이었다. 이제 또 식단을 짜고 그에 맞춰 장을 봐야 될 타이밍이 돌아왔다. 일단 해 먹은 지 좀 오래된 것, 그래서 한 번쯤 해 먹어야 만드는 법을 까먹지 않을 것 같은 메뉴 몇 가지를 줄줄 써 보았다. 그랬더니 하나같이 김치가 들어가는 음식들이었다.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심지어 부대찌개까지. 아, 안 되겠다. 그냥 이번엔 큰맘 먹고 김치 한 봉지 사자. 한 봉지 사서, 별 거 별 거 다 해 먹자. 나는 그렇게 결심하고는 4백 그램 한 봉지에 6천 원도 넘는 김치 한 봉지를 카트에 담았다. 그래놓고도 생각보다 금액이 많이 나온 것이 다 그 김치 때문인 것 같아 몇 번이나 눈을 흘기며 그냥 못 이기는 척하고 저걸 빼버릴까 말까를 몇 번이나 고민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2년 가까이 하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뭐든 마음먹을 때 안 하면 언제 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반숙 계란 프라이를 올란 김치볶음밥의 유혹은 생각보다 컸고, 그래서 나는 결국 눈을 딱 감고 그 김치를 그냥 사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실로 며칠 만에 크리스마스에 혼자서라도 먹을 케이크를 예약해 놓은 것을 찾으러 나갔다 올 생각이다. 그리고 다녀와서는 도대체 얼마 만에 먹어보는지 계산도 안 되는 김치볶음밥을 해서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를 혼자 보낼 생각이다. 그가 있을 땐 이까짓 김치볶음밥 따위, 정말로 먹을 것 없을 때나 찬스 비슷하게 써먹던 메뉴였는데 혼자 남은 지금은 이렇게 온갖 것들을 다 거쳐야만 겨우 한 번 먹어볼 수 있는 그런 메뉴가 되었다. 혼자 된다는 건, 결국 그런 것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