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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일을 하는 생활의 좋지 않은 점 중의 하나는 날짜감각이 ㅁ아가지기 쉽다는 것이다. 평일도 평일인 줄 모르고 휴일도 휴일인 줄 모르는, 1년 365일이 내내 평일인 것 같은 휴일과 휴일인 것 같은 평일이 애매하게 뒤섞여서 지나간다.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 또한 나름 금토일 3일 연휴라는 사실을 나는 금요일 밤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알았다.
내가 정해놓은 그와의 데이트 날짜는 대개 매월 둘째 주 토요일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나는 우리끼리의 기념일이거나 발렌타인데이 같은 '무슨 날'이거나 혹은 내가 삶에 지쳐 불쑥 그에게 무슨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어지면 불쑥 봉안당에 찾아가는 편이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당연히 그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하라는 인사라도 하러 봉안당에 가는 날이다.
외출할 일정이 있는 날은 그 핑계로 전기장판의 온기를 억지로 뿌리치고, 그래도 제시간에 일어난다. 자리에서 일어나 얼어서 뻑뻑해진 창문을 억지로 여는 순간, 나는 잠깐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느라 바깥공기가 추운 것도 잊었다. 어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찾으러 나갈 때는 그래도 길 따라 녹아있던 눈이, 오늘은 그리 많지는 않으나마 그 위로 새로 슈가파우더라도 뿌린 듯 새로 와 있었다. 어제 핸드폰에 새벽부터 눈이 올 예정이라는 알림이 오더니만 그때 눈이 좀 왔던 모양이다. 오늘도 버스를 내려서 만만치 않은 경사길을 한참이나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날이 날이니만큼 눈이 좀 오면 좋기는 하겠지만 이왕 올 거 하루만 좀 늦게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순전히 나 좋으라고 하는 생각을 한다. 한동안은 나 봉안당 가는 날은 오던 비도 안 오고 오던 눈도 안 오더니, 이 사람도 이제 슬슬 무뎌져서 이젠 그런 것 정도는 좀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 되기라도 한 것인지.
어쨌든 이 힘들고 고된 세상, 제 몫의 숙제를 전부 끝내고 먼저 좋은 데로 간 사람이니 자꾸만 불러대면 편히 못 쉰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야 하리라고도 생각한다. 무슨 일만 생기면 쪼르르 봉안당으로 달려가 아 진짜 나 이렇게 힘든데 나 좀 안 도와줄 거냐고 징징대는 그런 짓도 언젠가는 그만해야 하려니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언제가 됐든 아직은 요원한 모양이다. 새로 산 디퓨저의 속뚜껑이 열리지 않을 때, 주방 천장의 형광등 하나가 눈에 띄게 조도가 떨어져 있어 조만간 갈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늦은 밤 뭔가를 먹고 싶은데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 주저될 때, 그 외에 이루 떠오르지 않은 그 수많은 순간들마다 나는 아직은 그에게 하소연하는 것 말고든 이렇다 할 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는가 안 오는가 하는 문제는 아마도 그의 소관 같은 것은 아닐 텐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