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거면 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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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손으로 뭔가 잘하는 일이 하나쯤 생기는 것은 나의 대단히 오랜 로망 중의 하나였다. 요리를 잘하든 뭔가를 잘 만들든 글씨를 잘 쓰든 뭐든 간에. 그 말인 즉 내가 손으로 하는 일중에 썩 잘하는 일은 없다는 의미가 되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나는 손재주가 별로 없는 편이고 손으로 하는 일 중에 그나마 좀 한다고 할 만한 것은 글(그나마 '글씨'는 제외) 쓰는 일 뿐이다. 물론 그것조차 실제로는 머리로 쓰는 것이고 손은 타자만을 칠 뿐이니 온전한 손재주의 영역에는 들어가지 못한다고나 해야 옳겠다.


그가 급작스레 떠나간 후 텅텅 비어버린 하루의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내가 벌인 일 가운데 그림 독학이 있다. 눈코입이 제자리에 붙은 사람을 그려보는 건 학생 때부터 유구한 내 위시리스트 중의 하나였다. 그에게 이런 말을 하면 그까짓 거 하면 되지, 하는 아주 속 편한 답을 했다. 지금 골치 아픈 일들 조금만 정리되면 취미반 미술학원 같은 걸 좀 다녀보든지 하라고. 그때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어느 세월에. 그리고 그는 정말로 내가 뭔가를 시작해 보기도 전에 먼저 내 곁을 떠나갔다.


요즘은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별의별 것을 다 배울 수 있는 편리한 시대다. 나 또한 그래서,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그림 강좌를 보고 태블릿에 따라 그리는 식으로 그림을 독학 중이다, 물론 아직은 어림도 없다. 나는 기본적인 선을 어떤 식으로 그어야 하는가조차도 모르는 쌩 초보이고, 그런 나에게 이 복잡한 구조의 인체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그린다는 건 막판에 도와주던 제자들이 죄다 도망가버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혼자서 그렸다는 미켈란젤로의 작업만큼이나 요원해 보인다. 그래도 용기를 내 시작할 때에 비해 아주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 있긴 한 것 같아서 그걸로 위안을 삼고 있는 중이다.


어제도 어제 분의 '낙서'를 하기 위해 태블릿을 켰다가 나는 사용하는 프로그램의 월정액 플랜이 기간만료되어 버린 것을 알았다. 잠깐만. 이 프로그램 연말이라고 뭐 세일 비슷한 거 하나 보던데.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 생각나 인터넷을 뒤져보니, 과연 그랬다. 1년 플랜을 연장하는 것과 프로그램 하나의 라이센스 영구 구입이 별로 가격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 이거 어떡하지. 이쯤에서 어김없이 발동한 선택장애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오늘 아침까지 왔다.


별 것도 아닌 걸로 이렇게까지 고민을 할 일인가도 싶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몇 만 원을 더 주고 영구 라이센스를 사는 것이 맞고, 내가 언제까지 그림 연습을 하겠다고 시간을 낼 수 있을지가 불분명하면 월정액을 결제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렇게 살을 발라놓고 보면 우스우리만큼 간단한 것을, 나는 머릿속에서 가지를 치는 온갖 생각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떻게 결제할 건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세일 기간은 내일까지고, 그러니 오늘내일 간에는 뭐라도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나는 괜히 그의 책상 쪽을 힐끔거리게 된다. 이럴 때 내가 영양가 없는 일로 고민을 하고 있으면 그는 옆에서 아 거 참 별 것도 아닌 걸로 인생 어렵게 사네 하는 핀잔을 주며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너는 또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하라는 식으로 매우 쉽고 명쾌한 답을 주곤 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가? 하는 맹한 대꾸 한마디를 남기고 그 훈수에 잠자코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그건 2년 전까지의 이야기다. 이제 내게는 그런 훈수를 둬 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월정액이냐 영구 라이센스냐 하는 문제를 놓고 아마도 세일이 끝나는 내일 오후 다섯 시까지는 피 터지게 고민하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건지, 가끔은 스스로가 좀 한심해지기도 한다. 그러게. 나는 그간 너무 오래, 너무 많이 그의 훈수를 의지하고 살아왔나 보다. 이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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