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자리 그대로니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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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불쑥 출출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정도도 제각기 조금씩 달라서 이 시간에 뭘 먹어 하는 정도의 생각으로 대충 넘어가 질 때도 있지만 뭐라도 먹지 않고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때도 있다. 혹은, 특정한 뭔가(치킨이라든지)가 너무 먹고 싶어져서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때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썩 인내심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내가 이 나이에 이까짓 것을 참아서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느냐고 느닷없이 발동한 식탐에 순순히 굴복해 뭐라도 먹는 편이다. 물론 다음날 아침에 체중계 위에 올라서 보고는 아 괜히 먹었어 하는 짤막한 후회를 하는 것까지가 이 프로세스의 완성이긴 하다.


어제는 밤 열 시도 넘은 시간에 급작스레 라면이 먹고 싶어져서 곤욕을 치렀다. 치킨이라든지 피자가 먹고 싶을 때는 그걸 또 시켜야 하고 시킨 걸 기다려야 하고 받아서 먹고 나서 치우고 하면 두어 시간은 너끈히 잡아먹는 데다가 그걸 지금 시켜서 언제 먹고 언제 잘 거냐는 생각이 식욕을 억누르는데 아주 조금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라면같이 당장 집에 있고 5분 만에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에 꽂힌 날은 저런 핑계가 별무소용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더 늦어지기 전에 빨리 먹고 치우는 게 답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순순히 그 늦은 시간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체중계에 올라가기 전 모르긴 해도 1킬로 정도는 쪄 있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 앞자리가 바뀌지 않은 걸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체중계에서 내려왔다.


그러고 보면 먹는 것에 대한 내 '죄책감'의 기준은 앞자리가 바뀌었느냐 안 바뀌었느냐 하는 매우 알량한 기준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뭘 좀 많이 먹었는데 싶은 날도 앞자리가 바뀌지 않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고 반대로 딱히 뭔가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앞자리가 바뀐 날은 왜 살이 도로 찔까를 고민하느라 아침 내내 기분이 언짢다. 물론 다이어트란 이런 식으로 느슨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며, 이런 식으로 대충 살면서 감히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닭가슴살과 고구마로 하루에 정해진 열량만을 먹고 서너 시간 이상씩을 운동하는 데 투자하는 진짜 '다이어터'들에 대한 심각한 모독일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부터 독하고 야무진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고, 그래서 그가 곁에 있을 때부터도 너무 불어버린 내 몸무게를 보면서 다이어트 좀 해야겠다는 말을 입밖에 꺼낸 적도 몇 번 있었지만 잘 가면 한 달 남짓만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포기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면 그는 늘 나는 네가 날씬하고 예쁜 것도 좋지만 스트레스 없이 나하고 같이 맛있는 것 맛있게 잘 먹어주는 네가 더 좋다는 말로 자괴감에 빠져 있는 나에게 슬그머니 면죄부를 건네주곤 했다. 이제 그런 핑곗거리가 되어주던 사람도 없으니 좀 빡세게 다이어트를 해야 할 텐데, 이렇게 느슨해서야 올해 안에 정상체중까지 빼보자는 어제 그 계획은 단박 실현이 가능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그렇다. 그가 곁에 있을 때 다이어트를 좀 했더라면. 그 핑계를 대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 그를 끌고 운동이라도 시작했더라면 그는 조금이라도 더 내 곁에 있을 수 있었을까. 이런 후회의 끝은 대개 이런 식으로 난다. 슬픈 일이지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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