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을 떨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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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소위 '지름신'이 올 때 가장 좋은 해결책 중 하나는 마트에 가는 것이다. 마트에서 파는 물건들은 대개 언젠가, 어딘가 쓰게 되는 물건들이기 때문에 집에 앉아서 컴퓨터나 핸드폰 화면 너머로만 보고 샀다가 내가 이걸 도대체 왜 돈 주고 샀을까를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반면에 가장 좋지 않은 해결책이기도 하다. 마트에서 파는 물건들은 대개 언젠가, 어딘가 쓰게 되는 물건들이기 때문에 이것도 집고 저것도 집는 손길에 일말의 죄책감도 없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좀 그런 날이었다. 간만에 마트에 가서, '최소 배송 금액을 맞춘다'는 핑계로 참 신나게 이것저것 마구 사댔다. 저녁 무렵 입이 심심할 때 먹을 과자도 한 묶음 사고, 한 병에 천 원도 안 하는 커피 음료도 두세 병 사고, 다 떨어져 가는 버터도 사고, 내일쯤 해 먹을 카레에 넣을 돼지고기 등심도 조금 사고, 이월 상품으로 싸게 나온 변기 세정제도 사고, 싸게 나온 물티슈도 두어 팩 사고, 뭐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우겨담다 보니 금방 배송 금액은 맞춰졌다. 역시나, 돈은 없는 게 문제지 쓸 데는 언제나 넘쳐나게 마련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계산을 하려고 계산대를 향해 가다가, 나는 문득 마트 한 구석의 와인 코너에서 발을 멈췄다. 해도 바뀌었는데 와인이라도 한 병 사 마실까. 그가 있던 시절 한 병 사다가 잘 나눠마시고 남은 와인은 처음엔 그가, 그가 떠나고 난 후로는 내가 이런저런 파스타니 리조또를 만들 때 참 알차게 썼다. 달달한 화이트 와인 한 병 사서 적당히 마시고, 남은 건 또 그렇게 쓰면 되지. 핑곗거리도 완벽했다. 나는 연말 연초를 맞아 그래도 약간은 할인하고 있는 와인들 중에서 그나마 만원이 채 안 되는 것으로 한 병을 골라 계산하고 집으로 가져왔다.


다만 문제는 그거였다. 와인 오프너를 도대체 어느 구석에 처박아놨는지 당체 찾을 수가 없었다. 있음직한 서너 군데를 뒤져보고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이 물건이 내가 찾을 수 있는 범주 밖에 처박혀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참 빠르게도 내리고 플랜 B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와인 오프너가 없을 때. 그 정도 간단한 키워드로도 인터넷에는 나와 같은 곤경을 먼저 겪은 많은 사람들의 글들이 줄줄이 올라와 있었다. 그중 제일 간단해 보이는 것은 라이터로 와인 병 입구를 적당히 달궈 주면 병 속에서 발생하는 가스 때문에 코르크 마개가 알아서 위로 밀려 올라온다는 아주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는 떠나기 1년쯤 전부터 담배를 끊었고, 그래서 현재 우리 집에 라이터라는 물건 자체가 없는 상황인 걸 내가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뭐 아주 단순 무식하게, 나사못 혹은 가위 혹은 열쇠 등등을 코르크 마개에 꽂은 뒤 재주껏 비틀거나 돌리거나 해서 뽑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내 힘으로는 무리였다. 택도 아니게 용을 쓰다가 몇 번 병을 밀칠 뻔하고 식은땀을 낸 뒤, 나는 이 이상 미련을 떠는 것은 이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나는 당장 겉옷을 주워 입고 집 앞 편의점에 갔다. 편의점에도 얼마 전부터 간단한 종류의 와인을 몇 가지 팔고 있었고, 와인을 판다면 오프너도 있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오프너는 딱 한 개 남아 있었다. 가격도 3천 원 정도라 생각보다 그리 비싸진 않아서 한참이나 하던 그 삽질들이 조금 무색하게 여겨졌다. 사 온 와인오프너는 무슨 맥가이버 칼처럼도 보이는 물건으로, 우리 집에 원래 있던 것과는 방식이 좀 달랐다. 인터넷을 뒤져 사용법 동영상을 한 번 보고, 시키는 대로 했더니 코르크 마개는 내가 수십 분 동안 한 삽질이 다 뭐였냐 싶을 정도로 우습고 쉽게 빠졌다. 그렇게 딴 와인으로, 나는 어제 조촐하게 나만의 신년회를 했다.


가위를 들고 앉아 그걸 어떻게 따 보겠다고 용을 쓰다가 가위 날에 손가락을 살짝 베여 피가 나 반창고까지 감는 일이 있었다. 그냥 순순히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인정하고 편의점에 갔으면 고생은 고생대로 안 하고 다치는 일은 다치는 일대로 없었을 텐데. 미련을 떠는 건 언제나 좋지 않다. 그가 늘 하던 말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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