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세제수전이 망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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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조금 오래된 집이다. 큰 문제는 없지만 어느 날은 주방 전등 스위치 접지가, 또 어느 날은 화장실 세면대 수전이, 또 어느 날은 보일러 삼방 벨트가 하는 식으로 돌아가면서 소소한 문제를 일으킨다. 주변 사람들이 이번 기회에 웬만하면 이사하라고 입을 모아 권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


그런 소소한 문제의 최신판은 그가 떠나기 얼마 전에 일어났다. 싱크대의 세제 수전이 망가진 것이다. 분명히 얼마 전에 세제를 부어 놓았는데도 설거지를 하려니 세제가 나오지 않아 아래를 살펴봤더니 세제를 담는 통이 고정되지 못하고 아래로 뚝 떨어져 있었다. 이참에 새 걸로 바꾸자는 데까지는 합의했는데 싱크대의 세제 수전 하나를 바꾸는 것도 말처럼 그렇게 쉽고 간단하진 않았다. 당장 싱크대에 타공이 몇 밀리로 되어 있는가도 확인해야 했고 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수전의 종류가 조금 달랐다. 그리고 새 수전을 덜컥 주문한다고 해도 그걸 과연 우리가 설치할 수 있는지, 누군가 전문가의 손을 빌어야 하는 것인지 하는 문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망가진 수전을 그냥 그렇게 두고 아쉬운 대로 다 쓴 바디워시 통을 씻어 세제를 부어서 싱크대 옆에 두고 수전 대용으로 썼다. 이거 다 쓰기 전에는 어떻게든 해결하자. 그런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 그래서 그가 떠나던 그날 아침에도 나는 복사지를 사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우리 집 싱크대에 뚫린 수전의 타공 지름이 몇 밀리냐 하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도 못한 채로.


그가 떠난 후 불과 2주 남짓 만에, 그까짓 7 퍼센트짜리 할인 쿠폰을 날리지 않겠답시고 아득바득 주문한 목록에는 얼마 만에야 사는지 기억도 안나는 펌프 용기에 담긴 주방세제도 있었다. 바디워시 통은 싱크대 위에 두기에는 솔직히 너무 컸고, 그 통을 볼 때마다 그날 아침 내게 무슨 일이 닥친 건지도 모르는 채 태평하게 복사지를 사러 바깥에 나갔다 오고 쓸데없는 전화 통화를 하고 심지어 커피까지 끓여 마시고 있었던 그 시간들이 떠올라 너무 괴로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망가져버린 싱크대의 세제 수전은 이젠 과연 언제나 고칠지 정말로 기약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루에 한 끼나 겨우 대충 먹다 보니 설거지의 양도 횟수도 그가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줄었고 그런 와중에 굳이 그 세제 수전을 고쳐야 할 필요성을 내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수전이 망가진 건 그가 떠나기도 한참 전이었고 그가 떠난지도 이제 한 달이 넘었으니 내가 그 수전을 쓰지 못한 것은 줄잡아 최소한 두세 달쯤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설거지를 할 때면 사나흘에 한 번 꼴로 그 망가진 수전을 몇 번 눌러보다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용기에 담긴 세제를 수세미에 짜서 설거지를 한다. 오빠 나 진짜 답 없다. 언제까지 이럴 거지. 이런 말들을 중얼거리면서. 어쩌면 나는 꽤나 오랫동안 싱크대 세제 수전이 망가졌고 그래서 이제 용기에 담긴 세제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가 없는 나날들에 익숙해지지 못하듯이.


설거지를 할 때마다 나는 느낀다. 내 삶의 모든 순간에 그가 묻어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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