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날 낙상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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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몇 가지 소소한 물건들이 떨어져서, 주말에 꼼짝도 하지 않고 집에 콕 처박혀 있기 위해서는 오늘쯤엔 잠시 마트라도 다녀와야 될 것 같다는 정말 집순이나 할 법한 생각을 했다. 심상치 않은 징조는 집 앞 횡단보에서부터 있었다. 녹다 얼어붙은 눈 때문에 한 번 미끄러질 뻔을 하고, 아 오늘 길 좀 이상한데 하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있다. 걸어가는 중에도 두어 번 신발 바닥이 미끄덩 하고 미끄러지는 기분이 나서 오늘 정말로 조심해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도 분명히 있다.


마트에 거의 다 왔을 무렵이었다. 학원이라도 가는지, 아이들 두엇이 깔깔거리고 뛰어가다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바닥에 손을 짚고 반쯤 미끄러지는 것을 봤다. 학생들 조심해야지. 그런 말이라도 하려다가, 이제 꼴에 어른 짓 하려는 거냐 싶은 마음에 피식 웃었다. 요즘 애들은 어련히 자기 앞가림 알아서 잘하니까 지나가던 아줌마 1 따위가 굳이 그런 잔소리하지 않아도―


이 정도까지 생각했을 때, 발 밑이 홱 미끄러지는 느낌이 났다. 웃기는 건 여기서 엉덩방아를 찧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듯이, 내게는 그렇게 느꺄진다는 사실이다. 아 큰 거 왔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엉덩이부터 허리까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모를 둔통이 밀려왔다. 흘끔흘끔 나를 돌아보며 가는 아까 그 아이들―정말이지 학생들 조심해야지 하는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지 않은 건 현시점 올해 들어 내가 가장 잘한 일일 것이다―의 얼굴이 보였다. 일정 나이 이상의 사람이 대개 다 그렇듯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으레 아픈 것보다는 '쪽팔리는' 것이 먼저인 법이라, 나는 벌떡 일어나 옷을 몇 번 털고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러는 중에도 한 번 더 가볍게 미끄러질 뻔을 했다. 몇 년 만인지 기억도 안 나는 낙상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직장에 취업해 서울에 오던 그 해에, 서울에는 그야말로 역대급 폭설이 내렸다. 지하철이 한 번인지 두 번인지 요금을 받지 않고 운행했을 정도였으니까. 당연히 '죽어도 눈 안 오는' 부산에 살다가 갑자기 그런 설국의 풍경을 맞닥뜨린 나는 그 해 겨울에만 줄잡아 예닐곱 번쯤은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랬던 기억이 있다. 다만 그때의 나는 이제 막 대학교 졸업한 청춘이었고 지금은 어딜 가도 애기엄마 혹은 아줌마 소리를 듣는 중년이라는 점, 그래서 그때는 그렇게 요란하게 넘어져 놓고도 창피한 것 조금만 빼면 아무 걱정이 없었지만 지금은 대번 아 이거 혹시 뼈 다친 거 아닌가 타박상 정도로 잘 넘어가야 되는데 하는 걱정부터 하게 된다는 점 정도가 다르겠지만.


아무튼 눈에 대한 첫 신고식을 그렇게 거창하게 치른 후, 나는 겨울 얼어붙은 길을 다닐 때 필요 이상으로 조심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간은 대개 같이 다니는 그가 워낙 반사신경이 좋은 사람이어서 넘어질 뻔하면 어떻게든 붙잡아 주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 볼썽사나운 낙상은 몇 년 만의 일인지 이젠 잘 셈도 되지 않긴 한다. 어쨌든 파스 한 장 붙이고 잔 덕분인지 허리를 숙일 때 가끔 좀 뜨끔한 것 말고 크게 불편한 점은 없는 것 같다. 그 핑계로 오늘은 홈트도 하루 쉬었다. 어차피 운동량이야 오늘 외출할 일이 있으니, 거기서 걸어 다니면서 채울 테고.


다만 억울한 건 그거다. 겨울철 낙상을 예방하기 위해 제일 먼저 꼽는 수칙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지 말라는 것인데, 난 어제 장갑도 꼈었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상태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위에도 썼듯이 어제 길 상태가 미끄러운 것도 알고 있었고, 나름 충분히 조심하느라고 조심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낙상을 피하지는 못했다. 일어날 낙상은 기어이 일어나는 법인 모양이다. 떠나갈 때가 된 사람은 어떻게든 떠나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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