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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되는 가장 직접적인 지표 중의 하나는 날이 얼마나 긴가 하는 것이다. 누가 그러라고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나는 대충 오후 여섯 시쯤엔 블라인드를 내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이걸로 오늘 하루 내 일과는 끝이라는 식의 사인을 준다. 그러나 여름에는 아직도 날이 이렇게 훤한데 벌써 블라인드를 내리기가 머뭇거려져서 조금 더 얼쩡거리게 되기도 한다. 반면에 겨울에는 여섯 시는커녕 다섯 시만 가까워와도 창문으로 새어나가는 우리 집의 불빛이 부담스럽게 느껴져 조금 빨리 블라인드를 내리기도 한다. 이런 시간 차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 내 생활은 전반적으로 많이 느슨해졌다. 자는 시간은 슬금슬금 늦어지고 있고 일어나는 시간 또한 그에 맞춰 슬금슬금 늦어지고 있다. 그래서 예전처럼 칼같이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리고 내 기상 시간에 그렇게 엉망이 된 것에는 아직도 캄캄한 바깥 풍경의 탓이 아주 조금은 있었다. 아직도 밖이 이렇게 어두우니까 조금만 더 꾸물거리다 일어나도 되겠지. 이런 식의 '정신승리'가 가능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그 짧아진 해가 바닥을 친 느낌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꽃병에 물을 갈아 그의 책상에 갖다 놓고 바라보는 해는, 그 올라오는 높이와 속도가 점점 일러지고 있다. 저녁에 블라인드를 내리는 시간도 이젠 뭐 그렇게까지 앞당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서, 날짜는 아직도 한겨울이지만 해가 가장 짧은 시기는 이미 통과했구나 하는 체감을 뚜렷하게 하게 된다.
하기야 이미 동지가 지난 지 조금 있으면 한 달이다. 동지라는 게 1년 중 가장 밤이 긴 날이라고 하니까, 동지가 지난 그다음 날부터 밤은 아주 미세하게나마 조금씩 짧아지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게 20일쯤 지난 지금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만큼 차이가 생긴 거겠지. 꽃병에 꽂은 꽃을 근 2년째 관리해 보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꽃은 만개하는 그 순간부터 시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낮과 밤의 길이 또한 비슷할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는 낮이 길어질 일만 남았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벌써 이 겨울이 다 끝난 듯한 착각마저 조금 들기도 한다.
올해 봄에는, 벌써 몇 년이나 사다 먹지 못한 케냐 AA 뉴크롭을 사다가 커피 두 잔을 내려서 한 잔은 그의 책상에 갖다두어야겠다는 조금 이른 생각을 한다. 아직도 날씨는 춥고, 그래서 패딩 없이는 집 앞 편의점조차 가기 싫어지고, 그 와중에 나는 며칠 전 빙판길에 넘어져 호되게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다시 그렇게 돌아오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