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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우리끼리 챙기던 소소한 기념일이기도 했고, 나갔다 와야 할 일이 생겨서 겸사겸사 외출하기로 했다. 통칭 집순이의 행동 패턴이라는 것은 대개 비슷해서 어떻게든 두 번 세 번 나갈 일을 막기 위해서 한 번 나갈 때 별의별 일을 다 보고 들어오기 때문에 보통 이런 날의 외출은 거의 하루종일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어제도 비슷했다.
문제는 어제 날씨가 나가서 돌아다니기에 썩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주 추운 날씨는 아니어서 그게 그나마 다행이긴 했는데 그 외의 모든 것들이 최악이었다. 집에서 나설 때만 해도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에서는 봉안당에 가서 그에게 이런저런 넋두리를 하고 나올 무렵부터 눈인지 비인지 더러는 우박인지 모를 것들이 터덕터덕 쏟아졌다. 그러나 일단 우산은 꺼내지 않았다. 가뜩이나 며칠 전 미끄러져 호되게 엉덩방아를 찧은 일로 며칠을 고생했고, 이 비탈길을 걸어내려 가면서 손에 뭔가를 쥐고 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비탈길만 걸어내려가면 버스 정류장이고, 거기서 버스를 탈 것이니 거기까지 가는 그 잠깐동안 굳이 우산을 쓰지 않아도 패딩에 달린 후드 정도나 뒤집어쓰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우산을 꺼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약속 장소까지 걸어가는 길도 비슷했다. 초행길이어서 핸드폰의 지도 앱도 들여다봐야 했고 그 와중에 손에 우산까지 들고 있을 생각을 하니 짜증이 더럭 나서, 나는 그냥 이번에도 약속 장소까지 가는 얼마간의 거리 동안 대충 참기로 했다. 여기까지 읽으신 많은 분들이 대충 앞으로 벌어진 일들을 짐작하실 것이다. 그대로였다. 거리가 짧아서, 조금만 가면 되니까, 길이 얼었으니까 등등의 온갖 핑계를 다 대며 이런 식으로 어제 하루 종일 나는 결국 가방 속에 든 우산을 꺼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그 추적추적 내리는 눈인지 비인지 모를 것을 홈빡 다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뜩이나 가방도 비좁은 참이었는데 이럴 거면 우산은 왜 가지고 나갔을까. 집에 돌아와 가방을 풀면서야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도 한번 젖어버린 우산은 그지없이 거천하기 귀찮은 물건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쓰지 않은 우산이야 착착 접어서 가방 한 구석에 집어넣어 두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물건이지만, 일단 비에 한번 젖어버린 우산은 그 길로 더없이 짐스러운 존재가 된다. 바닥에 떨어지는 물도, 옷에 묻는 물도 모두가 거추장스럽다.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든 어엿한 1인분의 짐 몫을 하는 데다가 조금만 다른 데 한눈을 팔았다가는 어딘가에 두고 오기도 쉽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하기가 귀찮았던 것이다. 차라리 이 비를 맞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아마도 나는 내가 대충 그런 인간인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우산을 가지고 나가지 않는 방법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도저히 우산을 안 쓰고는 안 될 수도 있으니 어쨌든 우산은 가지고 나가 본 것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건 미련하다고 해야 하는지 혹은 귀찮은 걸 죽기보다 싫어한다고 해야 하는지, 한나절이 지나 생각해도 나는 이런 나의 행동을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마도 그가 있었더라면 나는 어제 그 일로 호되게 야단을 맞았을 것이며, 이 추운 날에 그러고 비 맞고 돌아다니다가 감기라도 걸려서 앓아누우면 그게 더 큰일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느냐는 말을 듣고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건 있다. 당신이 아직도 내 곁에 있었더라면 어제 봉안당에 갈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어제 같은 날 일부러 약속을 잡아 나가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도. 그러니까, 그런 말은 당신이 내게 할 말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