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산 백합도 거의 2주 정도를 갔다. 오래간 것도 오래 간 거지만, 무엇보다도 목이 꺾여 부러지지 않아서 난 그게 제일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요컨대 몇 번이고 글에서 언급한 '얼굴이; 크고 예쁜 꽃일수록 지는 모습이 좋지 않다'는 명제는 꽃의 특징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꽃의 선도 같은 것에도 영향을 많이 받는 모양이라, 결국 절반 정도만 사실인 모양이다.
구름같이 피어 있던 백합들을 시든 것부터 하나 둘 솎아내고 나니 이제 남은 것은 딱 다섯 송이뿐이다. 그리고 그나마 남은 다섯 송이들도 줄기부터 색이 누렇게 바래서, 이제 매일 한두 송이씩 그 생을 다해가고 있다. '은퇴'할 때가 된 이 백합은 며칠 전부터는 내 책상으로 자리를 옮겨 왔고 근 2주간 백합이 자리하던 그의 책상에는 새로 사 온 프리지아와 안개꽃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 아침도 늘 그랬듯, 꽃병 두 개를 들고나가 물을 갈고 꽃대를 새로 잘라 꽂아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수명이 다 한 백합 한 송이를 마저 잘라내고 다시 꽃병에 꽂다가, 나는 백합의 마지막 봉오리 하나의 끝이 아주 조금 벌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난번 겹백합 때부터 관찰한 결과. 백합은 봉오리가 이런 식으로 끝부터 벌어지기 시작하면 피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봉오리는 같이 온 친구들이 만개하다 못해 하나 둘 생을 다해가는 지금에 와서 제 타이밍을 잡고는 지금이라도 꽃을 피워볼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 각오가 기특하고도 새삼 대단하게 느껴져서 나는 그 벌어지기 시작한 봉오리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넌 코스모스야. 아직 봄이잖아. 찬찬히 기다리면 가을에 가장 예쁘게 필 거야. 그러니까 너무 초조해하지 마.
그가 떠나기 전 같이 보던 어느 드라마에서, 난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며 좌절하던 손녀에게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한다. 그때도 아 참 좋은 말이다 생각해서 다이어리 어느 귀퉁이에 적어두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같은 꽃병에 꽂힌 백합끼리도 꽃이 피는 시기는 제각각 다 다르며. 개중엔 정말로 이젠 다 끝났구나 싶은 순간에 피는 개체도 있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어쨌든 이로서, 내 책상으로 옮겨온 백합 꽃병의 수명은 이 마지막 백합이 피고 지는 순간까지로 정해졌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는, 나는 이 백합들의 마지막을 끝의 끝까지 지켜봐 줄 생각이다. 언제 제대로 핀 적이 있긴 했나 싶은 내 인생에도 언젠가, 좋은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