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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고부터, 아니 실은 그 한참 전 기온이 슬금슬금 내려가기 시작할 무렵부터 불쑥 등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사는 불편함 중에서도 단연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이 '등이 가려운 순간'은 내게도 비슷하게 찾아왔다. 손이 닿는 범위라면 혼자 어떻게든 긁어보지만 그게 안 되는 경우라면 그지없이 난감할 때가 많다. 이걸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하다 못해 플라스틱 자 가지고라도 어떻게든 등을 긁어보려고 애쓰고 있다 보면 스스로 처량맞아지는 기분을 감추기가 힘들어지곤 한다.
도대체 이럴 때 남들은 어떻게 하는가 싶어 인터넷을 찾아본 적이 있다. 언젠가도 쓴 말인 것 같지만 인터넷의 가장 큰 효용은 '나만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등이 가려울 대 혼자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지혜를 구하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아쉽게도 효자손이나 플라스틱 자, 긴 막대 등등의 나도 뻔하게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답에서 그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깨나 팔 부위의 스트레칭 방법을 올려놓은 블로그도 더러 눈에 띄었다. 혼자서 등을 긁을 수 없다면 관절염 증상인 거라는 뜨끔한 말과 함께.
나보다 세 살이나 많았고, 나보다 한참이나 어른인 줄로만 알았던 그 역시도 '별 것도 아닌 일에 삐지는' 그렇고 그런 보통 남자에 불과했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사소한 말다툼을 하고 서로 뚱해 있으면, 그는 말없이 책상 서랍을 열어 30센티짜리 플라스틱 자를 꺼내 그걸로 등을 긁곤 했다. 그 모양이 눈에 띄면 나는 뭘 하고 있었든 간에 냉큼 달려가 등짝을 한 대 때리고는 옆에 있는 사람은 놔뒀다 국이라도 끓여 먹을 생각이냐며 그의 등을 긁어주곤 했고, 그렇게 등을 긁어주고는 등 가려운 거 피부가 건조해서 그런 거라는 어디서 주워들은 풍월과 함께 등에 바디로션 같은 것을 발라주는 것으로 냉전 아닌 냉전을 끝내곤 했다. 별 것도 아닌 많은 다툼을 우리는 그렇게 싱겁게 화해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 되었지만.
요컨대, 그렇다. 혼자서 등을 못 긁는 건 정말 관절염 때문인지도 모른다. 등이 가려워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나에게 삐진 그가 그랬듯 플라스틱 자라도 쓰면 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내게 삐졌다는 표시를 내기 위해 혼자 시원하지도 않은 플라스틱 자로 등을 긁는 따위의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이 없고, 그런 사람을 향해 옆에 있는 사람은 뒀다 국 끓여 먹을 생각이냐며 타박할 수도 없고, 양껏 아는 체를 하며 그 등에 바디로션을 발라줄 수도 없다. 내가 그래줄 수도 없거니와 내게 그래줄 사람 역시도 없다. 가끔 등이 가려울 때마다 저도 모르게 비어있는 그의 책상을 바라보게 되는 건, 그게 꼭 굳어버린 내 회전근개의 가동범위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쩔 수 없다. 효자손이라도 하나 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