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쯤 전 서울을 떠나 처음 지금 사는 이곳으로 왔을 때 내가 느낀 것은 '딱 좋다'는 것이었다. 적당히 있을 건 다 있으면서도 뭐가 너무 많아 발에 채이지는 않는, 그 정도의 느낌인 것이 좋았다. 물론 처음엔 생각보다 은행이 멀고 생각보다 스타벅스가 멀고 생각보다 마트가 멀어서 좀 당황하긴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그건 여기에 뭐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서울에 뭐가 너무 많이 있는 것일 뿐이라고. 그래서 나는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가급적이면 여기서 계속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한 번씩 서울에 나가야 한다. 그리고 서울에 나가야 할 일정이 잡히면 며칠 전부터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다행히 약속 장소가 강남이나 구로 쪽에서 잡히면 쾌재를 부른다. 그건 그야말로 불행 중 다행, 혹은 최악 속의 최선이라 할 만한 결과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내 생업상 대부분의 미팅은 광화문이나 마포, 합정 쪽에서 잡힌다. 최악은 홍대 쪽이다. 홍대 쪽에서 미팅이 잡히면 농담 좀 보태서 대전에서 만나는 것이 낫다는 볼멘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팅은 내가 을의 자격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내게는 장소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처지가 못 되는 경우가 태반이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간만에 제시간에 일찍 일어나 홍대까지 나갈 차편을 검색해 보고 있는 중이다.
뭐 문제는 비교적 간단하다. 눈 딱 감고 지하철을 타면 된다. 한 번에 편하게 가는 노선 같은 건 있지도 않고, 수도권의 지하철 노선이 생긴 모양상 그럴 수도 없다. 그래도 그 길고 복잡한 거리를 딱 한 번만 갈아타면 갈 수 있다는 건 대단히 복 받은 케이스일 것이다. 다만 문제는, 내가 어지간하면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다는 데 있다. 부산에서 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는 우리 집과 지하철 노선의 끝과 끝쪽에 있었다. 편도로만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같이 두 시간씩 타고 다니는 노릇을 4년 동안 하고 나서, 나는 어지간하면 지하철을 안 타고 싶게 돼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도 어떻게든 지상으로 다니는 버스를 타고 갔다 오고 싶어서 온갖 머리를 쥐어짜는 중이다. 그의 말마따나 길 찾기 경로를 검색해 주는 AI는 아직 이런 쪽의 '센스'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가 있을 때는 얘기가 좀 달랐다. 홍대 쪽에서 미팅이 잡히면 그날은 그야말로 '이왕 나가는 김에' 온 홍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못 먹어본 식당에 가보고 못 가본 빵집을 가보고 못 구경한 것들을 구경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 생각해 보면 미팅은 뒷전이고 실은 놀러 나가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생각건대 그건 차가 있고 없고의 문제, 그러니까 편하게 갈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마음가짐에 대한 문제였다. 지금 누군가가 승용차로 나를 편하게 홍대에 떨어뜨려준다고 해도 나는 그때처럼 홍대 거리를 헤집고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자신 같은 게 없으니까.
오늘도 아마 그럴 것 같다. 그냥 내게는, 며칠 전처럼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찍는 날 잡히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생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갔다 와야 되는 미팅 정도일 뿐 그 이상의 의미 같은 걸 부여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니까, 이럴 거면 차라리 대전에서 만나자고 농반진반 투덜거려라도 볼까. 그런 생각을 한다. 대전엔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빵집도 있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