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을 삶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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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런지, 왜 이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지 하는 생각에 우울해질 때 내가 쓰는 방법 중의 하나는 쓰는 수건을 몽땅 꺼내 삶는 것이다. 우리 집 세탁기는 구식이라 삶는 기능 같은 게 없고(물론 있다고 해도 이럴 때 쓸 것 같지는 않지만) 또한 우리 집에는 빨래를 삶을 때 쓰는 솥 같은 것도 없기 때문에 집안의 모든 수건을 한꺼번에 삶지는 못하고 몇 번에 나눠서 삶아야 한다. 이러노라면 하루가 후딱 다 가곤 한다.


이미 몇 번을 말한 바 나는 딱히 깔끔한 성품도 아니고 집안 살림에 목숨을 거는 '주부 9단'도 아니다. 그러나 수건을 삶아 빠는 이 작업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는데, 일단 그간 늘 깨끗하게 관리하느라고 했던 수건조차도 저렇게 삶아보면 꽤나 깊숙이 찌든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내가 그간 이렇게 더러운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내 마음까지 조금 깨끗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삶아서 빨아 말린 수건은 굳이 건조기를 동원해 말라지 않아도 어느 정도 제 올이 살아나 한결 두툼해지고 보송해진다. 그 수건을 차곡차곡 개어서 수건장에 갖다 넣으면, 뭔가 대단히 크고 중요한 일을 해낸 것 같은 기분에 괜히 뿌듯해지는 것이다. 생각건대 나는 그 순간의 성취감을 좋아했던 게 아닐까.


또 한 번 수건 삶는 작업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요즘 이런저런 일로 골머리가 조금 아프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수건들이 죄다 볼품없이 납작해져서 올이 다 죽어버린 탓도 있었다. 이런 건 그냥 한 번 삶아서 빨면 다시 보송보송해질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우리 집에서 쓰는 수건 중 몇 장은 그런 정도의 응급처치로 살아날 수준이 이미 지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좀 머쓱해졌다. 뭐 어느 집이나 사정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집에도 제작된 지 십 년도 넘은(대개 개업 기념 수건 등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수건은 수건을 돌린 날짜가 아예 박혀 있어서 눈 가리고 아웅 하지도 못한다) 수건이 몇 장이나 현역으로 뛰고 있고 이런 수건들은 원단 자체가 얇고 힘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냥 이 참에 수건 몇 장 버리고 새것으로 바꿀까.


그가 떠나기 얼마 전에도 나는 큰 맘을 먹고 쓰던 수건 몇 장을 폐기하고 그만큼의 수건을 새로 샀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본 '수건 길들이는 법'에 의거해 색깔 별로 찬물에 울 세탁 모드로 세탁해서 썼다. 뭘 수건 하나 사서 쓰는데 그렇게까지 목숨을 거느냐는 그를 향해 그래도 이왕 돈 주고 사서 쓰는 것 이렇게 하면 좋지 않으냐는 나의 항변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었다. 그랬던 '새 수건'들도 이제 다 올이 죽어서 원래 제 두께의 3분의 2 정도로 납작해진 것을 보니 정말로 수건 한 번 삶을 때가 되기는 한 모양이다.


어영부영 연휴도 오늘로써 끝난다. 가뜩이나 짧은 2월은, 그나마 올해는 덤이 하루 정도 있다지만 한 2주 지나면 후루룩 지나가 버릴 테고 날이야 춥건 말건 그때부터는 또 자의 반 타의 반 봄이다. 벌써 그가 떠나간 지 2년이 되어가는구나. 그런 생각에, 또 잠깐 쓸쓸해진다. 수건 삶을 생각을 하다가 비화가 너무 심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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